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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2)<제32화>골동품비화40년(1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다완과 「옥토끼」>
지금까지 30여년을 넘겨 살아온 내 집을 짓게 된 기연도 실은 골동과 관계가 있다. 1930년대 초에 지금 사는 삼선교가 개발될 때 터를 사놨다가 10년 후에 짓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자재의 고갈이 우심해지자 도저히 집을 지을 엄두도 못 낼 형편이었다.
당시 3만원 이상의 주택은 건축허가가 안나왔다. 이 집을 짓기 여러 해 앞서 나를 자주 찾는 환자인 백목부인에게 계룡산 다완 하나를 7백원에 사준 일이 있다.
골동상이 8백원 달라는 것을 1백원 깎아서 사주었는데 그후 내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역시 나를 자주 찾는 환자인 천전이란 사람은 당시 철도국의 공사를 청부맡아 큰돈을 벌었는데 백목부인이 다완을 샀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도 하나 사달라고 했다.
다완을 사달라고 한지 3년 후에 신보골동상에 무안요에서 만든 것인 듯한 분인 하나가 나왔다고 해서 가보니 2천4백원을 달라고 했다. 원래 천지를 통해서 이 다완을 사들인 신보는 내가 조르는 바람에 4백원을 깎아서 2천원에 팔기로 했다. 자동전화가 처음 개통됐을 무렵 이러한 내용을 천전에게 알리니 서두르는 목소리로 인력거를 타고 오라고 했다.
혹시 당황한 나머지 그릇을 깨뜨릴까 염려해서였다. 이 다완을 사들인 천전은 나중에 천천백교가 대단한 물건이라고 감정을 해주어 몹시 좋아했다. 그 이듬해 천전이 일본에 갔을 때 표다완의 13대 종사라고 하는 일목에게 다시 감정을 받았다한다.
경도대학을 나오고 38세인 이 일목이 이름만 지으면 2천원 짜리 그릇도 단번에 5만원은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일목이 「옥토」라고 지어주니 천전이 뛸듯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그후 몇 년이 지나 이 다완은 이왕직 박물관에 전시되어 「수」의 등급을 땄다. 이러한 연고로 해서 고맙게 여긴 천전은 건축자재를 공정가격으로 대주어 값싸게 집을 짓게 되었다.
일인들은 다완중에도 특히 우리나라의 분청을 제일로 알았고 이를 「삼도」라고 불러 으뜸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원래 분청은 고려가 쇠운에 접어들면서 상감청자의 기술이 차차 뒤떨어지자 북송 자주요의 영향을 받아 조선조 초기부터 많이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 모두들 이것이 고려 이전의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릴 것이 고려상감은 지극히 매끄럽고 화려한데 비하여 분청은 수수하고 일견 투박스러운 질감을 풍기기 때문이다. 물론 어용이나 관청의 내방에서 쓰이는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만든 것이 대부분이나 서민의 일상생활에 알맞도록 되어 있고 그 빛은 솜씨에 서민다운 흥겨운 「판타지」가 어리는 것이다.
대체로 일본 다도에 쓰이는 다기로는 웅천이나 김해 다완을 최고의 제품으로 여겼는데 실은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전래해간 것이며 우리나라의 요지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
일인들이 이 분청류를 어떤 뜻에서인지 「삼도수」라고 부르고 높이 모시게 된 것이 일·한합방 전후부터의 일이다.
일본의 전통 도예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매끄러워지고 세련되기는 했다. 하지만 점점 야해지고 속취가 풍겨 분칭은 물론이려니와 그들의 조상인 웅천이나 김해요에서 볼 수 있는 서민의 고졸한 기품은 이미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의 도예가는 대대로 도제식의 사제상승의 전통으로 기예를 세련시켜 왔다지만 우리나라의 분청을 빚은 도공은 당대에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들이 빚은 그릇은 세도가의 다기도 아니며 그렇다고 공명이 앞서는 명기도 아니었다.
근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자기의 천분을 살려 소박하게 자연애 순응하면서 만들어낸 그릇이기 때문에 한결 인간적인 체취를 감득하게 된다. 그 모양을 보면 어느 것은 찌그러지고, 뒤뚱거리기도 하는데 일견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예컨대 고려청자에서 보이는 세장하고 정치하며 차디찬 냉기는 전혀 맛볼 수 없다.
가령 도공은 그릇을 빚을 때 흙을 만지며 돌리는 녹로가 수평을 이루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멋대로 만든 듯도 하다.
그래서 완벽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집념보다는 자연에 수순하겠다는 겸허한 순진성이 엿보여 차디찬 명부를 연상계 하는 고려청자보다는 그 점을 높이 살만하다.
이를테면 얼른 뚝딱 직인의 소성대로 만들어진데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귀알에 백분을 묻혀 화장한 붓자국이라든지, 흡사 무념의 자기라 할 만한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실정시대부터 소위 무사도라는 것과 불가의 선이 야합을 하는데 그 중간의 다리를 놓는 것이 바로 다도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러한 도를 닦는 차를 마시는 그릇은 얼른 뚝딱 무념의 상태에서 만든 우리나라의 분청이 최고가 아닐 수 없다.
분청은 모양도 그렇거니와 그림도 자연의 소성을 그대로 나타내어 그것을 만든 직공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돋보이게 드러낸다. 항아리를 보아도 어깨에서 몸 전체로 흐르는 선이 아주 부드러워 푸근한 운감을 줄뿐 아니라 붓끝이 가는 대로 멋대로 휘두른 철사안료의 그림 때문에 아주 유쾌한 기본을 감출 수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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