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말기로 벌이는 소리 없는 한밤의 경매 전쟁 … 그래서 100원 더 싼 딸기 한 박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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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일과를 마쳐 세상마저 고요해지는 오전 2시. 하지만 이곳만은 예외다.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이하 가락시장)은 이제 하루가 시작된다. 가락시장 건물 4개동 가운데 과일을 파는 청과시장 건물에 환하게 불이 켜지자, 전국 농가에서 재배한 딸기와 감귤 등 과일을 실은 대형트럭이 속속 도착했다.

도매상들은 경매 시작 전 과일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전광판에 과일 품종과 등급, 총량 등 정보가 뜨지만 다들 직접 확인한다. 몇몇 도매상은 아예 박스를 슬쩍 뜯어 과일을 맛보기도 했다. 수십년 경력의 베테랑 도매상이라도 한순간 방심했다간 좋지 않은 과일을 비싼 값에 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매장 안은 도매상과 소매상이 뒤엉켜 북적였다. 경매는 원칙적으로 도매상만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몇몇 부지런한 소매상은 경매장에 들어와 이날의 시세와 과일 상태 등을 꼼꼼하게 확인한 뒤 평소 거래하는 도매상에게 원하는 물건을 사달라고 부탁한다. 이날 경매장 안에서 만난 소매상 김효식(51·서울 화곡동)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단골 위주로 거래하기 때문에 좋은 과일을 골라야 한다”며 경매과정을 쭉 지켜봤다.

스피커를 통해 중개사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퍼져 나오며 경매가 시작됐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도매상 손가락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 수작업으로 진행하던 경매는 이젠 디지털 기기인 입찰기 방식으로 바뀌었다. 중개사가 경매에 부칠 과일을 소개하면 도매상들은 입찰기에 입찰가를 입력한다.

전광판에 정신없이 바뀌는 낙찰 상황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오전 2시반에 시작한 딸기 경매는 새벽 4시쯤 1500박스를 팔고 끝났다. 몇몇 도매상은 뭔가 뜻대로 안됐는지 경매사에게 다가가 “내가 누른 숫자가 입력이 되긴 하는 거요”라며 농 섞인 항의를 살짝 하기도 했다.

"지나갑니다.”

낙찰된 딸기를 실은 수레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이젠 낙찰받은 도매상을 거쳐 소매상, 그리고 우리 식탁 위에 오를 일만 남은 거다. 100원이라도 더 싸게 말이다.

이날 딸기 경매를 진행한 서영우(54?아래 사진) 영업2팀 부장은 경력 30년의 베테랑 경매사다. 가락시장에는 총 10명의 경매사가 있는데서 부장은 딸기 전문가다. 1989년부터 딸기를 팔았다.

맛 보지 않고 외양만 봐도 당도가 한눈에 파악돼 대략 얼마쯤에 팔려 나갈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새벽 2시 30분 딸기 경매 현장음

서 부장은 매일 오전 1시에 출근한다. 경매를 마치고 출고량을 확인하는 등 뒷정리를 마치면 오전 10시쯤 퇴근한다. 뭐, 경매 진행이 지연되면 정오를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과거엔 봄에만 딸기를 팔았다. 하지만 10여년 전 하우스 딸기가 나오면서부터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계속 딸기 경매가 진행된다. 딸기 경매가 없는 계절에는 다른 과일 경매를 지원한다. 한 달에 딱 두 번 쉴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 다 못 쉴 때가 많다. 농장주나 도매상 모두 서 부장이 경매를 진행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다른 경매사가 진행하면 판매량이 부장님만 못해요” 라는 상인들 말에 그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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