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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66)|박갑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마지막 본 박>
혁명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모두 전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북한에 와 보니 복수·차별·탄압이 소위 사회주의의 틀치고는 중세기적이며 추악하기 짝이 없다. 월남 자 가족에 대해서는 복수요, 남로당과 이남출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차별이요, 일반인민에 대해서는 탄압이다.
박헌영이 나에게 북에 와서는 불편불만을 품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박헌영이 김일성 정권의 이러한 암흑상을 모를 리가 없다. 잘 아는 만큼 이에 대하여 불편불만을 품으면 어느 귀신이 잡아가는지도 모르게 말살 당한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l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처음으로 열리었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북한 정권 당국에서는 휴전회담이 8월 15일까지는 성공적으로 타결되어 8월 15일 해방기념일에는 대 축하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대전시 회를 조직하는데 문화선전 부 구라파부가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국제성원 관을 만들기로 결정이 되었었다.
국제성원 관이라는 것은 한국동란에 있어서 공산권나라들이 저들의 한패인 북한을 얼마나 지지하며 원조하는가를 눈으로 직관 물로써 인민대중과 각국 외교사절단에 전람시키려는 목적 하에 조직한 것이다. 그 일은 부득이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장소는 아동궁사이며 외무성과 여맹과 민청의 협력을 받았다. 원조물품은 동구라파 사회주의국가들 뿐만 아니라 서구라파 각국의 좌익민간단체로부터도 상당히 와 있었다.
그러나 그 물품들은 폭격 때문에 대부분이 중국 안동에 쌓여 있었다. 폭격은 심하고 장마가 쳐서 미는 주룩주룩 오고 도무지 예정대로 진척되지 않았었다. 휴전회담도 잘 진전되지 않는데 8월 15일까지는 꼭 될 것이니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개관하게 준비를 완료하라는 것이었다. 상인 허정숙이 와서 독촉을 해도 잘 안되니 나중에는 당부위원장 허가이가 당비서장 박정애를 데리고 직접 현장인 아동궁사까지 와서 나를 보고『잘 되나 못되나 전 책임은 동무에게 있소』하며 다짐을 하고 가는 것이었다.
「나 혼자의 힘으로써 이러한 큰 사업의 책임을 질 수가 있는가?』하며 그와 다툰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허가이와 가까이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는 그때「스탈린」과 똑같은 모자와 양복을 입었는데 풍 골은「스탈린」보다 나아 보였다. 말하는 투가 보통이 아니고 틀로서는 김일성·박헌영보다 나아 보였다. 그는 소련서「트랙터」운전사출신이다 하는데 확실히 소질은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 전날인가 박헌영이 다른 일로 아동궁전 옆까지 왔다가 잠깐 아동궁전의 국재성원 관의 내가 일하는 곳까지 와서 나를 보고 고개를 꺼득꺼득 하며 격려해 주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것이 나와 박헌영의 최후의 상면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그와의 최후의 장면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었다.
8윌 14일이 되어도 휴전회담은 다 잘 되지 않고 폭격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하여져 갔다. 14에 평양에 대한 대 폭격이 있었다.
나는 공습경보의「사이렌」이 쉴새 없이 울어대고 땅이 울려 심장까지 울려와 방공호에 대피하지 않고 마지막 완성을 재촉하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폭탄이 떨어져 심장이 떨어질 것 같이 땅이 울리며 아동궁전 안의 전등불이 꺼지니 창문을 전부 봉하였기 때문에 밤중 같이 갑자기 캄캄하여지는 것이었다. 밖으로 뛰어 나가려 했으나 진열장으로 간을 막아 놨기 때문에 삥삥 한참 돌아야 나가게 되어 있었다.
비상문으로 뛰어가니 도둑 때문에 잠그고 못을 쳐 놓았었다. 엉겁결에 두발로 차니 문이 뚝 떨어져 나가며 나 자신도 밖으로 나가 떨어져 버렸다. 그 순간 내 뒤에서 아동궁전 한복판에 직격탄이 명중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고막이 떨리고 눈이 캄캄하며 한참동안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하늘을 쳐다보니 미국공군기의 편대가 갈매기 떼와 같이 평양하늘을 제멋대로 누비며 폭탄과 기총 소사를 퍼붓는 것이었다.
평양시내에는 개미 한 마리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높은 언덕인 아동궁전의 주위에는 매연이 자옥한데 남은 벽돌 굴뚝만 몇 개 우뚝 서 있었다. 둘러 쓴 흙을 털고 아동궁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에 있던 사람은 새까만 흙먼지를 둘러쓰고 다 죽었고 진열장은 박살이 나 있었다.
그것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전쟁을 도발한자들, 8월15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지도 않는 것을 대 축하회를 한다고 명령으로써 억지 일을 시켜 이렇게 인민의 희생을 댄 북한당국자들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임은 그자들이 지지 않고 결국은 약한 나의 어깨에다 짊어지고 만 것이다. 나 혼자만 왜 살아났는가, 회의에서 두들겨 맞을 것을 생각하니 죽는 것만 차라리 못한 생각이 들었었다.
예상대로 얼마 후에 총 결하는 회의가 열렸었다. 전 책임을 나에게 둘러씌우려는 것을 나는 허가이 부위원장과 박정애 비서 장이 와서 14일 밤 12시까지 완성하지 않으면 당신 책임을 묻겠다고 한 사실을 지적하여 단호히 반론하며 책임은 면할 수 있었으나 모든 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였다. 피곤할 대로 피곤해지고 건강도 극도로 나빠져 나는 당시 이강국이 병원장을 하고 있는 만경대의「웽그리아」병원에 입원을 하였었다. 조용한 시간을 가지니 참으로 마음의 고향 서울생각이 간절하였다. 두 달 전부터 길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나와 대남 공작을 하자던 것을 거절한 일이 생각났다.
김영주는 그때 중성 하나를 달고(소령) 인민군 총 정치 국에서 소위 적진와해공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서울에서 최후까지 머물러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와 사업을 같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6·25동란이후 북한의 경치와 실태를 체험해 보고 이 세계에서 가장 질이 나쁜 김일성 체제를 돕는데 손을 안 빌려주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던 것이다. 김영주는 그때 총 장난을 좋아하며 허리에 찬 권총에 말 한마디하고는, 손을 대고 하더니 지금은 출세를 하여 남북조절위원회의 북한측 대표가 되었으니 20여 년이란 세원은 참으로 긴다는 것을 새삼스러이 느끼게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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