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2)제3화 고려신사 59대 궁사 고려징웅씨(3)|제1장 자랑스런「귀화인」의 후예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망명 일족의 지도자로>
약광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2년 전 고구려 사신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일본서기』천지 천황 5년(666년) 10월 기미 조에 보면『을상부창』을 대 사신으로, 달상둔을 부사로, 그리고 종2위 현무 약광 등이 고구려에서 파견되어 왔다』고 쓰여 있다.
아마도 이때 약광은 사신으로 일본에 왔다가 이곳 정치·풍물·인심 등을 익혀 가지고 일단 고국에 돌아간 것으로 짐작된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668년.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한 것이라면 약광은 나·당 연합군에 빼앗긴 조국을 뒤에 두고, 사신으로 가본 일이 있는 일본에 망명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일족을 거느린 약광은 동해를 건너 뱃길을 멀리 동쪽 태평양 연안으로 들려 상모만 해변가「오오이소」에 닻을 내렸다. 바다를 앞에 둔 현 신나천현대기는 땅도 비옥할 뿐 아니라 기후로도 살아가기가 수월했다.
대기「게하히사까」에서 화수교에 이르는 대기촌에 삶의 터를 잡은 약광은 망명 일족의 지도자로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개척의 터전을 넓혀 갔다.

<일 조정서 왕씨 성 받아>
망명 일족의 통솔력과 개척의 위 덕으로 약광은 일본 조정에 인정을 받게 된다.
문무제 대실 3년(703년) 4월 을미 조에는 일본에서 종5위의 벼슬을 받게 되고 이어「고끼시」(왕)라는 성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왕」이란 안동 김씨, 밀양 박씨 등 지연이나 족벌에 의한 성씨가 아니라, 「신」「연」「진인」등 공로가 많은 조신에게 붙여 주는 영작과 같은 것이었다.
약광이 고구려 왕족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특히「고끼시」(왕)라는 성을 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끼시」란 실상 왕을 가리키는 우리 나라 고어「고길지」에서 나온 발음이다.
망명 후 35년만에 약광은「왕」이라는 성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국을 등진 슬픔을 조금이라도 씻으려고 땅 파기에 전념, 겨우 삶의 터를 기름지게 일구어 놓은 이들에게 일본 조정은 다시 한번 가혹한 시련의 고달픔을 안겨 주었다.
해변을 끼고 있는 비옥함 대기 땅에서 황무지인 무장국(전회에 언급한 고려향)으로 씨족의 대 이동을 명한 것이다.
그 당시 무장야는 갈대가 숲처럼 우거지 말 탄 무사들이 숨바꼭질을 할 정도였다고 노래에도 나와 있다. 30여 년간 피땀 흘려 가꾸어 놓은 삶의 터전을 모두 버리고 이 고구려 유민들은 약광의 인솔 아래 지금의 고려 촌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다.
망국의 슬픔을 다시 한번 되씹은 이 씨족 이동이 곧 영귀 2년(712년), 당시 일본 7개 고을의 고려인 1천7백99명을 무장국에 옮기게 하여 고려 군을 설치케 했다는 고사가 되는 것이다.
이 때 대기에 살던 고구려 유민이 한 사람도 남겨지지 않고 모두 강제로 이동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기에 주저앉은 일부 고구려 유민들도 약광의 덕을 추앙, 대기에도 역시 고려 신사(후에 고래 신사로 이름을 바꿈)를 세워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고구려 문화 보존 힘써>
왕 약광이 새 개척의 땅 무장을 밟았을 때는 그도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 지금 고려 신사가 있는 자리에 새 터전을 잡은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려 군민은 물론 대기 촌의 망향에 젖은 불쌍한 백성들도 따뜻이 보살펴 주었을 것이다.
약광이 고국을 떠날 때는 일본의 힘을 빌어 의병이라도 이끌고, 나·당 연합군에 빼앗긴 조국 강산을 되찾아 고구려를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리라는 벅찬 희망에 젖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개척이라는 고달픔에 시달리는 동안 고구려 중흥의 꿈도 사라지고 다만 고려라는 이름이 남겨진 무장야 땅 한구석에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의 뜻은 길이 길이 살아 고려 군 일대에 또 다시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고구려 유민들은 황무지 무장야에 힘찬 삽질을 하는 한편 고국 고구려의 문화 보존에 힘써 나량천평 시대(729∼766)에는 이 일대가 일본 전국을 통해 가장 문화적으로 발전된 고장으로 손꼽혔다고 고문헌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왕약광의 직손 고려 씨는 그 14대 일대 때에 이르러 그가 모시는 고려 명신에게「대궁」의 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이 명중을 모시는 사자는『대궁사 아무개로 고려씨 대신 통칭되었다』고 고려 씨 계도는 설명한다.

<5백년 동안 동족 결혼>
1230년, 그러니까 고려 군에 터전을 잡은 후 5백여년 동안은 동족끼리만 결혼을 해 왔으나 고려 씨는 27대 일 대순 때 처음으로 다른 혈통의 일본 여자와 결혼하기 시작했다. 현궁사 고려징웅씨는 고려 씨 가문이 일본 여자와 결혼하게 된 것을『당시의 막부(겸창)압력 때문에 부득이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27대 영순 때인 1259년 11월8일에는 큰불이 일어나 고구려에서 가져온 보물과 함께 고려 씨 계도 원본이 불타 버린 일도 있다. 고려 가는 여러 친척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여 고 기록을 더듬어 다시 고려 씨 계도를 만들었다.
따라서 27대 1260년 때까지가 한 필치로 적혀 있는 것이다.
고려 씨 문중에서는 지금의 59대까지 내려오는 동안 불도에 귀의한 자들도 나와 대궁사 대신 「고려사」로 성씨를 바꿔 부른 적도 있으며, 신사와 승악사의 책임을 함께 맡아 「대궁사」라고 정한 적도 있다. 그런가 하면 불도 수행에 뜻을 더 두어 다문방·청승원 등으로 부른 적도 있다.
고려 씨는 55대째인 명치 초의 이른바「신불분리령」에 따라 고려신사의 궁사성으로 다시 못 박혀졌다.

<동종 매단 초라한 종각>
승악사 인왕문은 1830년쯤 6년간에 걸쳐 세운 건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왕문에서 경사가 급한 돌층계를 오르면 성천환희불을 모신 그리 크지 않은 본당이 있고, 가운데 뜰 왼쪽에 사실로 일컬어지는 동종이 초라한 원두막 식 종각 안에 매달려 있다.
이 동종에는 문응 2년(1261년)이란 각명이 보인다. 종장2척7촌의 작은 것이지만 그래도 7백10여년 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당은 숲이 우거진 높지 않은 고려 산을 뒤에 두고 고려향 일대가 고스란히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은 낯선 객들에겐 어딘가 초라하게만 보인다. 찾는 이도 신사보다 훨씬 적으며, 절을 지키는 중도 어디를 갔는지 저녁때인 데도 만날 수가 없었다.『일본에서는 길이나 잘 닦고, 집을 새로 짓는 등 겉치장은 잘하지만 문화재 보호에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40여년 전 내가 태어난 옛집을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 하여 문화재로 지정할 뻔도 했지만 그것을 복원하는데는 1천만「앵」든다고 하자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아깝기 짝이 없는 손실이지요.』
고려징웅씨의 못내 섭섭해하던 이야기가 이 너무도 조용하기 만한 고사에서 다시 생각났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