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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6)|<제자 박갑동>박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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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침준비>
전회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평양의 김일성은 4월의 정치위원회의 결정에 의하여 전쟁준비를 착착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위원회 결정의 제1의 조항인『당 기관·정권기관·민청·직업동맹(노동조합)·농민연맹들로부터 대량의 인원을 선발하여 군대를 증강한다』는데 관하여서는 각 도당 부위원장급을 사단의 문화부사령관(부사단장·정치담당)으로 전속시키는 것을 위시하여 당과 정권기관의 각급 간부들을 각각 그 지위에 의하여 각 연대·대대·소대의 장교로, 민청·직맹(노조)·농맹의 맹원들을 대량 신병으로 징집하였다.
제2조항인 『남한 출신의 당윈·「빨치산」을 전원 남한의 후방 깊게 침투시킨다』는데 관하여서는 월북해간 남로당원과「빨치산」들을 육로로는 38선의 각 지점을 넘어 월남시키는 동시에 해로로는 인천 또는 충남의 해안지대에 상륙시켰다. 그때 남노당 해주 연락소 책임자 박승원은 해로로 충남의 대천해안에 상륙하여 6월25일에 이미 전북 전주시에 와서 잠복하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인천 수상서에는 이북에서 월남하여 오다가 잡힌 남노당원이 7, 8명이나 잡혀 있다는 정보가 우리측에 들어왔었다.
재3조항인『도 단위로 간부를 선발하여 남한 점령지구의 행정요원으로 특별훈련을 한다』는데 관하여는 북한의 평양특별시 및 각도 단위로 중견간부를 선발하여 남한의 담당 구역을 정하여 담당구역에 관한 지식과 현실을 강습시키는 동시에 특히 남노당원들과의 협동작업과 소위 반동분자에 대한 공작활동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담당구역은 예를 들면 평양특별시는 서울특별시를 담당시키고, 황해도의 무슨 도는 경기도의 어느 군을 담당한다 고정하여 담당구역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르쳤던 것이다.
제4조항인 『무력통일을 은폐하기 위하여 평화통일의 선전 캄파를 조직한다』는데 관하여는 첫째로 1950년6월7일 평양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확대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평화통일에 관한 제안을 하여 김일성은 평화통일을 가장 열렬히 염원하며 또 그의 실현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입장을 널리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①통일적인 최고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8월5일에서 8일 사이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
②8·15해방 제5주년 기념일을 통일된 조국에서 맞이하기 위하여 이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최고입법기관회의를 8월15일 서울에서 소집할 것.
③평화적 통일에 필요한 모든 조건과 전차를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남북한의 진정한 사회단체 대표자 협의회를 38선 부근의 해주시 또는 개성시(당시38선 이남)의 어디서든지 6월15일에서 I7일 사이에 소집할 것.
이상의 조항을 방송하였었다. 그리고는 6월10일에 이르러 이강국 통일민주주의전선 확대 중앙위원회의 제안을 한국 측에 전달하기 위하여 세 사람의 사절단을 개성에 파견한다 하였다. 그들이 38선을 넘자 곧 경찰에 체포되었었다.
이렇게 되자 「조국통일전선」은 사태의 수습을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에 맡긴다고 하였었다.
같은 6월10일 평양방송은 조만식(46년l월부터 평양에 감금되어있는 북조선민주당당수)과 감삼룡(50년3월에 서울에서 체포된 남노당 지하당의 최고책임자)을 서로 교환하자는 주장을 했다.
평양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6월19일(5·30총 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한국 제2기 국회개회일) 한국국회에 대하여
A, 북한최고인민회의와 남한 국회를 합동하여 단일의 전조선 입법기관으로서 소집할 것.
B,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의 3명의 사절단원을 즉시 석방할 것 등을 제안해 왔었다.
이것은 6·25의 기습을 감행하는 꼭 1주일 전이었다.
동시에 평양방송은 이승만·이범석·김성수·신성모·조병옥·신익희·윤치영·신흥우·채병덕 등 아홉 사람 이외의 정치 책임은 일체 묻지 않겠다고 눈가림의 선전까지 했다.
그들은 이미 4월에 있었던 정치위원회의 결정의 「프로그램」에 의하여 무력통일의 기습작전을 은폐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했었는데 당시 한국정부당국과 정보분석가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정부의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미국당국에 있어서도 평양 측의 이러한 침략적인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는지 미국의 국무장관고문 「덜레스」는 6월17일 내한하여 6월19일 국회개회식에서 연설하기로 되어있었다. 그 전날 그는 38선 현지를 시찰하면서『진달래 꽃구경하러 왔다』는 농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양 측의 이러한 평화공세가 적어도 석 달 내지 반년은 계속될 줄 알았다. 적어도 반년 이상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취하는 체하고 전술을 바꾸어 다른 수단을 써서 나올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6월7일부터 6월25일까지 3주일도 안 되는 촉박한 기간에 단지 전쟁의 도발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전술로서 이러한 수단을 피울 줄은 몰랐다.
정치는 대의명분이고 특히 통일사업은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수행하여야 할 것을 기만 전술로써 나온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이러한 비열한 수단은 김일성 자신이 비방하고있는 일본군국주의자들 전술의 모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일본군벌들이 1941년 12월8일 대미전쟁을 도발할 때 그들의 기습을 은폐하기 위하여 『일·미 회담을 성공시키는데 성의를 보이기 위하여 「구루스」(내서) 대사를 응원하러 파견한다』고하여 「구루스」대사가 태평양 한 가운데 갔을 때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전쟁을 도발한 전술을원숭이 흉내낸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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