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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14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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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노당의 괴멸>
김삼룡이 잡히고, 이주하가 잡히고, 그리고 또 정태식까지 드디어 잡히고 말았다. 이 세 사람이 잡혔다는 것은 남노당 지하당의 괴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실 박헌영의 발 밑에서, 서 있는 축담이 와르르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4월초에 평양에 서있을 노동당 정치위원회에서 김일성의 무력통일방안을 반대하고 박헌영에게 남노당 지하당 통일방안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평양으로 보내려던 기도도 모두 김삼룡과 정태식의 체포로 허사가 되고만 것이다.
세상일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이로구나.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하여, 김일성의 무력 남침을 막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분투하고 있는데 이 서울 장안에서 아무도 이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하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겨우 「아지트」에 돌아갔으나 그날 밤에 갑자기 열이 39도까지 올라 의사를 부를 수도 없고 밤새도록 몸이 불덩어리같이 되여 생사의 간을 헤매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니 열이 조금 내려 정신을 돌릴 수가 있었다. 머리 위에 「아지트·키퍼」인 「어머니」가 물수건으로 나의 이마를 식혀주며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남로당원의 어머니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감옥에 들어가고 나니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는 어머니를 나의 「아지트」의 「키퍼」로 맞이하며 이웃 사람들에게는 친 모자로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밤중에 자꾸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헛소리를 하셔서 걱정을 하였어요. 오늘은 집안에서 푹 쉬세요.』 「어머니」는 겨우 눈을 뜬 나에게 걱정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쟁이 일어난다고 헛소리를 하였어요?』하고 나는 하도 이상하여 「어머니」에게 도리어 물어봤다.
그것은 나의 마음의 어느 한구석에 잠재하여 있던 의식이 무의식중에 발로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머니」되에 다른 사람이 듣지 않은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평양의 박헌영에게서 남북통일에 대한 남로당지하당의 방안을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을 때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나는 직감하였던 젓이었다. 김삼룡이 3월27일까지 보고서를 작성하여 가지고 오라고 할 때 4월초에는 우리가 작성한 보고서가 평양의 박헌영에게 도달될 것이니 그 무렵에 평양에서 중대한 정치위원회가 열려 박헌영이 우리의 지하당의 보고서를 가지고 김일성에게 남노당 지하당은 이러한 견해와 주장을 하고 있으니 현지의 지하당의 의견을 존중하여 고려하여 달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력통일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김삼룡에게 제출하기 위하여 갔었던 것이었다. 그런 것이 그만 우리의 그 보고서를 김삼룡에게 전달하기 전에 김삼룡이 체포되어 그 보고서를 평양으로 보낼 길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남로당지하당이 괴멸된 이상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대항할 실력부대를 잃었으며 비중은 가벼워져 박헌영이 정치위원회에서 아무리 명 연설을 하여도 그것은 김일성을 견제할 수는 없게 되고 말았다.
4월초에 있을 『전쟁이냐, 평화냐』하는 결정적인 정치위원회에서 박헌영은 이제야 김일성의 거수기가 되어서 김일성이 하자하는 대로 무조건 찬성하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하지 못하게되고 말았다. 설혹 박헌영이 전쟁을 반대하고 싶어도 절대적인 근거 없이는 반대할 수가 없었을 터이었다.
나는 우리가 작성한 무력통일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김삼룡에게 전달 못하였을 때 우리지하당의 보고서 없이는 박헌영이 평양에서 김일성의 무력통일방침에 반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촉수할 정도로 마음속으로 안타까워하였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열로 혼수상태에 있을 때 『전쟁이 일어난다』고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한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걱정한대로 1950년4월초에 평양에서 조선노동당중앙정치위원회가 있었다는 것을 6·25동란 후에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 정치위원회에서 한국에 대한 무력침공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정치위원회의 내용을 자세히 보기로 하자.
이 정치위원회에는 김일성(위원장), 박헌영(부위원장), 허가이(부위원장), 이승엽·김두봉(이상 정치위원)의 각 정치위원회 「멤버」와 노동당정치위원은 아니었으나 민족보위 상이며 인민군총사령관(김일성은 고위의 최고사령관)인 최용건(그는 당시 표면상으로는 노동당원이 아니고 북조선민주당위원장이었었다)이 참석하였다.
첫째로 김일성이 「조국의 통일 문제에 관한 건」에 관하여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보고 가운데서, 현 단계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하고 현 단계에 있어서는 무력통일만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위원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망하였다.
김일성의 기조보고에 이어 민족보위 상(국방상)인 최용건이 군사담당자의 입장에서 한국군에 관한 군사보고를 하였다.
눈치가 빠른 정치위원들은 김일성과 최용건의 보고를 듣고 김일성이 이미 무력통일을 하려고 결심한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극 비밀리에 김일성과 평양주재소련대사 「스티코프」 및 소련군사고문단 간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소련공산당약사」를 다 읽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혁명 때 그날 「11월7일」에 봉기하자는 주장에 주저하며 반대한자는 모조리 비겁 분자로서 숙청 당한 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노동당 정치위원들도 그러한 「비겁 분자」로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계속><제자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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