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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태순(작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요즘 침묵을 지키는 소설가들이 많다 비교적 활발히 작가활동을 하는 이외 작품들에도 어쩐지 소심한 기미가 엿보인다.
이 시대가 틀림없이 가지고 있는 고민에 짓눌린 탓, 작금 년의 커다란 변화를 아직껏 문학으로 접수하지 못한 채 움츠러든 탓, 역사 인식에의 근원적인 모색을 더듬고 있는 탓, 그런 여러 탓 때문이다.
전변의 시대에는 그러나 새로운 생각들이 움트고있을 것이다. 문학은 시대를 앞질러, 또는 시대의 뒤편에서 선각과 후각의 참담함으로 눈을 뜰 것이다. 더우기 신문·잡지에는 제 머리를 가졌는가 의심스럽게 하는 해괴한 글발들이 허공에 뜬 백구처럼 오락가락 하는 모양도 보이니 기침이 난다.
글이란 적어도 글쓰는 사람에게는 가장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적어놓게 하는 원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글의 세계에 있어서 그것은 무수한 「진실들간의 투쟁」이 되겠지만, 우리 시대가 이상으로 갈구하는바가 무엇인가를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진실에의 정직한 감수성을 드러낸 작품을 기대하기에 목이 마르다.
무더운 8월이기는 하지만,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게 하고 당황하게 하는 소설은 없는가.
이번 달에는 그런 소설을 못 읽었다. 독자를 너무 편하게 하는 소설은 도리어 겁이 나게 한다.
오탁번 씨의 『거인』(문학사상)은 실상 소인의 세계를 읊은 것이다. 위로부터의 명령에 응하기만 하는「양순한 백성들」의 소심성과 비겁성이 노출되어 지고, 이들은 주택문제를 들고일어나지만, 막연히 「거인」 이라 생각했던 자가 실상 헛것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아이러니」를 느끼고 있다. 어떤 상식적 교훈을 유도하는 것 같으나, 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생에의 갈구하는 자세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위룡준 씨의『입소기』(세대)는 전투를 직업으로 삼았던 군인의 어제와 오늘이 신랄하게 나타나 있다. 어제의 전투참가자는 오늘의 향토예비군 훈련자가 되지만,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동원되어 왔을 뿐이라는 자각이 날카로운 현실감각과 풍부한 실전삽화로써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이 불편한 소설이 아니고 읽기에 편한 소설로 고의적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사회생활에의 이해타산 감각과 능청스런 입심을 부리고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배면에 6.25라는 활화산을 분출시키고 있다. 흔히 우리는 본격적 전쟁문학이 있느냐 없느냐고 들 하지만, 전쟁문학이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이와 같은 심상한 듯한 작품 속에 그 아픔이 박혀있음을 확인하게되는 것이다.
박연희 씨의 『탈』(현대문학)은 이 시대를 떠돌 수밖에 없는 한 민간인의 생활에 파편처럼 박혀든 상처들을 찾아서 그것으로 엮어진 작품이다. 권력 없고 재산 없는, 그러나 생과 사회에 어떤 수준의 자각증상을 가지고 있는 중년사내의 태양 잃은 생활은, 차라리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감 삿갓의 방랑을 닮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조국을 등지는 서독 행 간호원, 지병인 펫병과의 싸움, 간첩 용의자로 몰린 친구로 인한 소환, 사업의 여의치 않음. 가족에 대한 책임. 어렸을 적의 시골 고향 이야기, 탈」로써 상징되는 동경의 세계, 문필업의 곤고, 공허하되 촉각적인 정직을 드러내는 대화들. 끊임없이 다가드는 자질구레한 사건들은 일정한 아픔과 실감으로 되돌아온다.
출구도 없고 하늘도 보이지 않는 생활이지만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청년들처럼 탈출과 모반을 준비하느니, 거기에 두드려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소실을 읽고 나서의 느낌이 공허한 것은 어쩌는 수 없다. 공허에 죄를 매길 수는 없으나 그 공허가 흐린 날의 저공을 유령처럼 헤매는 구름장과 같은 것이라면 차라리 땅을 딛고 싶은 것이다.
농촌 속의 생활 풍정을 줄곧 긍정적인 자세로 다뤄오고 있는 박경수 씨가 이 달에는 『귀성길에서』(월간중앙)를 통해 이미 도시인이 돼버린 농촌출신 주인공의 귀성길 회상으로 일그러진 농촌의 한 단면을 더듬는다.
부 농가의 아들이었던 주인공의 친구 윤덕이 어떤 과정을 통해 몰락하며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가를 보여주면서 도시인의 눈에 비친 우리네 농촌 생활의, 나아가서는 전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제시한다.
가령 『사람이 산다는 게 뭐라나? 나 같은 인간은 안 났어야 될 인간이 아닌가?』는 윤덕 의 푸념은 다만 윤덕 한 사람의 푸념만은 아닐 것이다.
이상 몇 작품을 통하여 우리의 정체되고 화석화된 사고방식과 생활태도의 벽을 깨뜨리는 정신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바로 그러한 정신을 밝혀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안겨주어야 한다. 어떠한 다른 편법도 준비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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