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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예 기자의 '위기의 가족'] 엄마의 마음병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사진 중앙포토]

휴직을 하고 1년을 한시적인 주부로 살아보니, 많은 것들이 달라지더군요. 아이가 아파도 내 탓 같고, 또래 아이보다 발육이 느려도 내 탓, 같은 어린이집 엄마들과 친해지기 어려운 것도 내 탓, 집안이 지저분한 것도 내 탓.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손가락이 그렇게 제 자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며 ‘내 탓’을 누그러뜨린 적이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한 연구팀에 따르면 만 35세 이상의 노산 여성 가운데 16.5%가 산후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여성들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요. 이번에는 이 마음의 감기에 걸린 엄마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내용은 각색합니다.

#아내의 이야기
“반찬이 이게 뭐냐”고? 간암 선고받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6년을 연애했다. 남편이 직장을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갔다. 그리고 나이 서른을 갓 넘길 즈음, 우리는 부부가 됐다. 결혼한 지 꼭 1년 만에 아기를 낳았다. 적은 월급이었지만 남편의 힘으로 우리는 알콩달콩 가정을 꾸려갔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긴 건 어머님이 편찮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병원에선 어머님의 병이 간암이라고 했다. 평생 술도 안 드시는 양반에게,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거듭되는 항암치료를 어머님은 못 견디셨다.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우리 둘은 시댁으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 매일 출근을 하는 남편은 효자였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회사에 가고 없는 사이 효자노릇을 대신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은 “반찬이 이게 뭐냐?”고 성을 내셨다. 아직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고, 병원을 따라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님은 내가 하는 행동거지가 성에 안 차시는 모양이었다. 어떤 날은 결혼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혼수 트집을 하셨다. 대체로 “누구네 며느리는 뭘 해왔다더라”식의 이야기였다. 아이를 업고 살림하는 나로선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부엌에 가도, 거실에 나와 TV를 봐도, 늘 잔소리가 따라다녔다. 숨 쉴 곳이 필요했다. 애가 감기라도 걸리면 ‘애미 탓’이고 밥을 잘 안 먹어도 ‘애미가 잘못 키워서’란 소리가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 눈물보를 켜는 스위치라도 올라간 건지. 밤마다 침대에 누우면 눈물이 절로 났다. 우리 엄마가 나를, 이렇게 살게 하려고 나은 건 아니겠지. 내일이라도 별반 다르겠나. 내일도, 오늘처럼 밥 차리고 청소하고, 어머님 수발을 들겠지.

어머님 잔소리가 뒤를 따라다니던 어느 날. 참다못해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다. “친정에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다”는 거짓말이 그렇게 술술 나올 줄은 나조차 몰랐다. 아이까지 맡겨놓은 터라, 몸이 홀가분했다. 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 동네 PC방을 갔다. 이렇게 콧바람을 쐬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담배에도 손이 갔다. 답답할 때마다 한 잔씩 하던 술도 늘었다. 내가 변해갈수록 남편과 자주 다퉜고, 당신 아들과 냉전하는 걸 지켜본 시부모님도 싸늘해졌다. 시부모님은 “너희들 없어도 병구완 할 수 있다. 나가 살라”고 했고, 결국 우린 분가를 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분가라지만, 시댁 코 앞이었다. 시댁 대소사를 챙기는 것은 모두 내 몫이었다. 힘들 때마다 나는 술과 담배를 했고, PC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하루 하루가 허망했다. 이러다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찾아간 병원. 의사는 내게 “중증 우울증과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남편의 이야기
우울증 속이고 결혼한 아내 … 자살 소동에 이혼 소송까지

요즘 여자들은 ‘시’자만 들어가도 싫어서 시금치도 안 먹는다고 하지 않나. 결혼하고 1년. 어머니의 암 발병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선뜻 내가 모시겠노라 나선 아내가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 눈엔 아무것도 아닌 일을, 아내는 못 견뎌 했다. 항암치료를 받는 어머니가 반찬 투정을 하실 수도 있는데, 아내는 그걸 흘려듣질 못했다. 남의 집 며느리와 비교하는 일도, 시쳇말로 “그러려니”하면 되는 것을. 아내는 참질 못하고 밤마다 분을 삭였다.

한밤중인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내. 처가에 간다던 아내는 PC방에 있었다. 손과 머리에서 묻어나는 담배냄새. “애엄마가 이래도 되냐”고 다그쳤지만 아내는 점점 달라졌다. 분가를 하면 달라지겠지 싶었지만 아내의 증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술을 더 자주 마셨고, 우리는 자주 다퉜다. 상담이라도 받아보자 싶어 찾아간 병원에선 ‘우울증’이라고 했다. 더욱 놀란 것은 아내가 결혼 전부터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아왔다는 거였다. 6년이나 연애를 했지만 단 한 번도 아내가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던 걸 몰랐다. “왜 말을 안했냐”는 말에 아내는 이혼을 꺼내들었다. 몇 날을 싸우고 아내는 각서를 썼다.

‘과거 우울증이 있음에도 병을 속이고 결혼했는데 앞으로 성실히 치료해 완치하겠다. 가출하거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협의이혼하며, 아이도 남편에게 양보하겠다.’

각서의 효과는 딱 한 달이었다. 아내는 한 달이 되자 보란 듯이 다시 집을 나가 술을 마셨다. 이 일을 알게 된 부모님은 놀라 아이를 데려갔다. 이혼을 하게 되자 아내는 과격해졌다. 회사를 찾아와 “죽어버리겠다”고 하거나, 직장상사에게 전활 걸어 “남편이 때렸다”고 하소연을 했다. 심지어 가짜로 진단서를 끊어 고소를 하기도 했다.

# 법원 “아내, 남편에게 위자료 2000만원 지급해야”

서울가정법원은 이 부부의 불화 원인이 아내에게 있다고 봤다. 법원은 “우울증을 인지하고도 성실히 치료받지 않고 방치한 점”을 근거로 들며 “2000만원의 위자료를 남편에게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법원은 특히 아이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부부를 위해 ‘면접교섭권’을 구체적으로 설정했다. 남편의 부모가 맡아 키우는 2살짜리 어린 아이의 안정을 위해 법원이 정한 범위 내에서만 아내가 만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재판부는 “아이 양육에 조부모가 열의를 가지고 있고 현재까지 아이를 잘 돌보고 있다”며 “아이의 친권과 양육권은 남편에게 줘야한다”고 판단했다. 남편은 “아내가 아이를 만날 때마다 소란을 피우고, 아이 만나는 것을 시댁식구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며 면접교섭을 막아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아이를 위해 면접교섭권을 아내가 악용하지 않는 상태로 제한해 보장해야 한다”고 봤다. 법원은 아내가 아이를 만날 때 ‘①남편과 시부모가 입회를 하고, ②아내가 폭언을 하거나 아이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을 것, ③소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란 세 가지 조건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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