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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123)-지하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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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렇게 하여 선출된 선거인들은 8월29일 해주에서 모여 남한선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백60명을 선출하였었다.
이때 발표한 숫자에 의하면 그때 이 지하선거에 참가하여 도장을 찍은 사람들의 수는 전 유권자의 70몇%에 달하며 5·10총선거에 참가한 사람들보다 많은 숫자였다. 물론 이 숫자 중에는 자기에 할당된 「노르마」를 완수하기 위하여 유권자도 못되는 자기 집 아이들 도장까지 파서 찍은 것과 누구를 뭐 때문에 도장을 찍는지도 잘 설명도 하지 않고 친분 있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찍힌 것도 많았으나 그래도 사실 많은 숫자에 이르렀다.
그때 남로당원수는 공칭 1백50만이라 하였고 그의 가족, 그의 친척, 친구, 지인 등 그리고 민전 산하의 세력도 포함하여 그 영향하의 사람들 수를 다 합하면 7, 8백만은 되었으리라고 주장되었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지하선거를 박헌영과 남로당은 수행하였다. 왜 이러한 억지선거를 하였었을까?
첫째 이유는 한국 국회는 이북 땅에서는 총선거를 실시하지 못하고 남한만의 정권이나, 북한정권은 이남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한 「전국적 정권」이라는 것을 선전하려고 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전은 몇 해 못 가서 파탄되고 말았다. 북한헌법에는 4년만에 한번씩 총선거를 하기로 되어있으나 1957년까지 제2회 총선거도 못하고 헌법조항을 유린하고 제1회 총선 후 9년 만인가 겨우 제2회 총선거를 하게되었는데 제2회 때는 『남한의 지하선거』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북한만의 선거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이유는 이것은 박헌영의 꿈이었으나 이렇게 함으로써 저들의 소위 최고인민회의(국회)가운데 북한의 김일성 지지세력보다 남한의 박헌영 지지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게되는 것이다. 물론 남한선출 3백60명의 대의원 중에는 3당 통합 때 친김일성파로 남로당을 쫓겨 나간 자들이 다른 정당과 사회단체의 소속원으로 포함되어 있었거나 세력분포로 봐서는 박헌영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위 북한의 헌법에 의하면 수상은 최고인민회의에서 선출하게 되어있으니 최고인민회의이외의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박헌영이 수상으로 선출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남로당 중앙위원수와 북로당 중앙위원수를 비교하여봐도 남로당 중앙위원수가 다수였기 때문에 남북노동당이 동등한 권한으로 합당한다면 당 중앙위원장도 박헌영이 다수로 선출될 계산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박헌영이 김일성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못 가지고 있는 것 단하나, 그것은 군사와 경찰의 힘이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 요소 때문에 남로당과 북로당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달라졌던 것이다. 평화통일노선을 취하면 박헌영이 유리하고, 무력통일노선을 취하여 성공하면 우리나라 전체는 김일성의 손아귀에 쥐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l949년 가을 당 중앙위원회상임위원회에 등용되어 가서 직접 박헌영의 지시에 의하여 1950년2월∼3월에 정태식을 보좌하며 통일에 관한 정책을 입안할 때 남로당은 평화통일을 절대적으로 주장하며 그것을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남로당의 약점은 자기의 무력을 가지지 못한데 있었다. 자기의 무력을 가지지 못한 정당이 어찌. 무력통일을 주장할 수가 있을까? 세간에는 남로당이 무력통일노선을 취하였다고 많이 주장되나 사실은 남로당의 기본구조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본다.
박헌영과 남로당이 곤란한 지하선거를 억지라도 진행한 것은 앞으로 수립될 북한의 국회(최고인민회의)안에서 다수를 차지할 가능성을 타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박헌영 남로당계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소위 저들의 행정부를 수립하였을 때 김일성은 무력을 담당하는 민족보위상(국방상)은 자기의 친우인 최용건으로서 장악하게 하고, 경찰을 장악하는 내무상은 자기세력과 동맹한 연안파인 박일우로서 담당케 하여 박헌영으로서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남로당계에는 변변찮은 농업성·도시 경영성·보건성·사법성의 장관 밖에 맡기지 않고 박헌영에게는 부수상과 외무상의 자리를 주었다. 외무성은 물론 박헌영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출신인 부상인 박동초가 운영하게 하였다.
국회에서의 다수파인 남로당은 정부기관에서는 반대로 소수파로 떨어지고 말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정치적 현상이었다.
김일성은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수는 인구비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남한출신자의 우세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당과 정부기관에 있어서는 자기가 우세를 누릴 포석을 진행하였다. 북로당의 부위원장 주영하는 박헌영에 가까웠었다. 김일성은 주영하가 위험하여서 부위원장으로 둘 수는 없었다. 9월9일이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주영하를 일단 교통상을 시켰다가 한달 후인 10월에는 주소대사로 소련의 「모스크바」로 띄워 버리고 북로당의 부위원장에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돕기 위하여 파견한 허가이를 대신 보충하였었다.
김일성은 자기보다 투쟁경력에 있어서 훨씬 뚜렷하며 선배인 박헌영을 점점 휘어잡아 한 정권 안에서 자기아랫자리에 끌어넣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박헌영에 있어서 객관적 정세는 점점 불리하여 가고 그의 입장은 점점 곤란하여져 간다. <계속> 【박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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