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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희망은 그대 가슴속에 숨겨져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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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언론학

영의정 김류가 말하고 인조가 답한다. 비에 젖은 자는 채 반이 안 됩니다. 아니다. 비가 온 산을 고루 내리는데 어찌 반만 젖었다 하느냐? 차라리 눈이 왔으면 나았을 것입니다, 아니, 비가 오는데 눈 얘기는 하지 말라, 어찌하면 좋겠느냐? 병조판서 이성구가 말하고 인조가 답한다. 적병들 또한 깊이 젖고 얼었으니 적세가 사납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적의 추위로 내 군병의 언 몸을 덥히겠느냐? 병판은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비가 올 만큼 왔으니 해가 뜰 것입니다. 아니, 군병이 얼고 젖었는데 병판은 해 뜨기만을 기다리는가? 병판이 기다리지 않아도 해는 뜬다. 떠서 적의 옷도 말릴 것이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다시 영의정이 말하고 인조가 답한다. 전하, 자꾸 신들더러 어쩌랴 어쩌랴 하지 마시옵소서. 어쩌랴 어쩌랴 하다 보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옵니다. 알았다. 내가 하지 않을 터니 경들도 하나마나한 말을 하지 말라. 그러나 어찌해야 하지 않겠느냐?

 코미디 한 토막 같지만 엄연한 역사의 한 대목이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망연자실하게 된다. 1636년 남한산성에 고립된 무능한 인조는 저열한 신하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 밤 내린 억센 겨울비로 성을 지키는 군졸들의 안위를 걱정해서다. 조선 지배층의 무능에 배신감을 넘어 실소마저 자아낸다. 저런 유의 인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살아간 조선 민초들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을 줄여 옮겼다.

 알려진 대로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틀어쥔 조선의 새 지배층은 기존의 외교전략에서 벗어나 청과의 한판 싸움을 외쳤고 이에 1636년 12월 청태종이 쳐들어와 인조가 도망간 남한산성을 닷새 만에 포위한다. 수많은 백성들은 도륙되었으며 아이들은 길바닥에 버려져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그해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굶주림에 병들고 얼어 죽은 군졸은 셀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배층은 논쟁만 벌이다가 자멸한다. 항복의 전말은 지독히도 치욕스러워 옮기기조차 두렵다.

 느닷없이 377년 전의 얘기를 꺼낸 것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너무 어지럽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 세대의 산업화에 이은 우리 세대의 민주화 성공으로 한국 사회가 행복하고 품위 있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학생들에게 이런 나라가 자랑스럽다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그런 자부심과는 거리가 멀다. 이웃 국가와의 외교관계는 싸늘하다 못해 살벌하다. 보·혁 간의 핏발 선 진영 싸움은 막장 수준이다. 시장주의와 성과주의의 만연으로 양극화는 극에 달했다. 경쟁에서 낙오된 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다양한 조사결과에서 보듯이 한국인의 삶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바닥이다. 불행하게도 삶은 그리 향기롭지 않아 보인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지난 삼 년간 나는 이 지면을 통해 꿈, 열정, 행복이 살아 있는 휴머니즘적인 삶의 가치를 주장해 왔다. 그러나 나의 목소리는 외로웠으며 지친 삶들에 작은 위무를 드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새봄에 대한 간절함은 얼어붙은 땅 밑에서도 꿈틀대고 있고, 판도라가 잡아둔 희망은 여전히 우리 삶 속에 숨겨져 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대목이다. 문장처럼 어느 시대가 누구에게는 최고일 수도, 최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최고의 시절은 언제쯤 올 것인가. 그런저런 걱정 속에 또 한 해가 쓸쓸하게 떠나고 있다. 아듀 2013 !

 *지난 삼 년 동안 중앙일보 독자와 만났다. 예외적으로 삼 년이라는 오랜 기간 지면을 할애해 준 덕분이다. 깊이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께도 작별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The best is yet to be ! 그래도 좋은 것은 언제나 미래에 있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언론학 yule21@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