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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혼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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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승희
워싱턴총국장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자 미국은 주일대사관 명의로 “실망스럽다”는 성명을 냈다. 이틀 뒤 일본 오키나와현은 후텐마에 있는 미 공군기지를 북부 헤코노 지역으로 이전하기로 하는 안을 승인했다. 그러자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은 “미·일 안보동맹은 더없이 탄탄하고, 두 나라 간 파트너십은 더 강해질 것”이라는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실망스럽다”는 성명은 짧은 세 문장짜리였다. 반면 일본 오카나와현의 결정을 환영한다는 성명은 10개의 문장으로 된, A4 용지 한 장짜리 긴 성명이었다.

 어느 성명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는 얘길 하려는 게 아니다. 미국에도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표현)’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미국이라는 주제를 놓고 한국의 전통 보수들에게 질문하면 십중팔구 우방이다. 반면 한국의 전통 진보들이 보는 미국은 차가운 제국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2013년 워싱턴에서 지켜본 미국은 그 중간쯤이다.

 재선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2013년은 고된 날의 연속이었다. 2009년 취임사에서 희망과 도전을 내세웠던 오바마는 2013년 취임사에선 동성애자의 권리와 소수자의 권리를 강조했다. 오바마케어가 대표 어젠다였다. 그 결과는 야당인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와의 끝없는 투쟁이었다. 113회 미 의회는 법안 제정 건수가 역대 최저인 57건에 그쳤다. CNN 조사에서 미국민의 72%는 “2013년 의회가 내 생애 최악의 의회”라고 답했다. 오바마케어를 둘러싼 대통령과 야당의 정쟁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될 전망이다.

 내정의 피곤함은 오바마 행정부로 하여금 외교에서도 힘을 잃게 했다. 시리아 사태가 단적인 예다. 화학무기 사용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해 놓고도 알아사드 정권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 미국을 겨우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와 불안한 봉합을 했다. 힘을 잃은 미국에 실망한 220만 명의 시리아 난민은 지금도 레바논·요르단·터키 등을 떠돌고 있다. 이게 현실 속 미국의 모습이다.

 오늘날 미국에 ‘동맹’이란 도덕이나 가치 같은 정서가 아니라 국익이다. “실망스럽다”는 성명에 반가워하며 아베의 일본을 미워하기를 바랐던 미국의 국방장관이 오랜 골칫거리인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튼튼한 미·일동맹”을 언급한 이유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미 동맹도 미국의 국익 속에 있을 때가 안전지대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11월 기준으로 1352억 달러다. 우리 돈으로 142조원이 넘는다. 미국은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태세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위협하는 중국에 맞서야 하는 미국은 여전히 아베의 일본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혼네를 직시해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2013년이 저물고 있다. 참으로 고단한 계사년이었다. 2014년은 갑오경장 120주년이다. 어지러운 외교의 각축 속에서 정치가 신경안정제 역할을 할 순 없을까.

박승희 워싱턴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