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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6)<제자 박갑동>|<제31화>내가 아는 박헌영 (114)|박갑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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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좌절된 음모>
폭동 개시일 이틀을 앞두고 내려진 중앙당의 「폭동 행동 지령 4항」은 당초 계획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8월14일 하오 9시를 기해 일제히 시위 운동을 벌일 것 ▲행동 개시령에 따라 경찰관·우익 인사의 실태와 그 관서·가옥에 방화할 것 ▲만약 행동 개시 지령이 정각까지 도착하지 않을 때에는 15일 정오를 기해 행동할 것 등이었다.
동시에 행동 때 외칠 구호도 하달됐는데 「미·소 공위 만세」, 「8·15 해방 만세」,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 반대」등이었고 혁명가를 부르도록 했다.
이렇듯 치밀한 계획 아래 민전이 중심이 된 8·15기념 행사 준비 위원회는 행동을 펴 나갔지만 당시 정부에서는 공위의 정돈 상태 등에 비추어 공산당의 음모를 예측했음인지 8월2일 행정 명령 제5호로써 8·15기념 행사의 옥외 집회를 일체 금지하고 서울시 주최로만 행사키로 결정지었다.
이 결정이 발표되자 민전은 표면상, 즉 합법적으로는 이를 취소토록 하는 교섭을 하면서도 내용에 있어서는 당의 기본 노선을 관철키 위해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즈음 처음으로 남로당의 헛점이 드러났다. 내가 앞서도 말했듯 급작스럽게 당원 확장을 벌인 조직상의 오류가 그때 빚어졌던 것이다.
그토록 극비리에 폭동을 계획했는데도 공산당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비밀이 새어나갔다.
각종 행동 계획뿐만 아니라 수뇌부의 거처까지 노출이 되어 행동 개시 12시간을 앞둔 15일 미명 남로당·전평·전농 등이 경찰의 수색을 받아 남로당 부위원장 이기석을 위시하여 최원택, 김태준, 강문석, 김상혁, 박기수, 유영준, 이귀훈 등 당 간부와 관련자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당으로서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계획은 계획 자체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좌익계 간부들의 대량 검거로 폭동 음모는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될 것은 이때 공산당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전향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박일원이었다. 그는 일찍이 박헌영의 비서로 활동하였고 그후 남로당 서울시당 선전부장으로 있다가 그때 체포된 것이다.
경성제대를 중퇴한 이 27세의 청년은 남로당의 조직 계통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소상했었다. 그러기에 그가 전향을 발표했을 때 남로당의 조직은 마치 고구마나 감자를 캘 때 그 줄기를 당기면 줄줄이 달려나오듯 송두리째 조직전체가 드러났던 것이다.
여기서 솔직히 말해둬야 할 것은 많은 공산당원들이 8·15폭동을 앞둔 남로당의 간부 대량 피검 때 박일원이 전향한 것으로 알았었는데 뒷날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전향한 것은 훨씬 전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수도청 사찰과 간부들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박일원이 체포된 것은 조선정판사 사전 직후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고 있던 때였다 한다.
그때 검거된 1백여명의 공산당원 중 당시 경기도당 청년부 책임자 박일원도 있었는데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씨가 집중적으로 전향공작을 폈던 것이다. 아마도 나이 어린 수재 청년을 역이용하자는 생각에서이었던 것 같다.
끈질긴 최 과장의 권고에 박은 전향케 됐고 1차 공작으로 우선 합법적 활동이 허용됐던 공산당으로 다시 돌아가서 경찰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작은 어찌나 극비리에 진행됐던지 당시 경찰 내부에서도 최 과장을 비롯, 2, 3명만이 알고 있었기에 그 뒤에도 여러 이름 있는 수사관들이 박일원을 잡으려고 무척이나 뒤쫓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만 해도 공산당원이 경찰에 검거되었다가 다시 풀려 나오는 일은 허다했으므로 공산당으로서는 아무런 의심을 할 근거가 없었기에 방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경찰에 전향한 후 공산당에 복귀한 사실은 당으로서는 도둑에게 금고 열쇠를 준 격이었고 고양이에 생선가게를 넘긴 사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기에 뒷날들은 이야기지만 46년9월12일의 이승만 저격 사건, 동년 9월24일 용산역의 철도 노동자 파업 사건, 10월 폭동 때의 주모자 등을 검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는 47년 겨울 오랫동안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수도청 사찰과 정보 주임에 취임, 앞서 말한 3·1절 기념식 사건과 그 뒤 장덕수 피살 사건 해결에 눈부신 활동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는 미국 공보원의 지원을 받아 『조선 공산당의 내막』 등의 저서를 출판해 공산당의 내부 붕괴에도 힘썼다.
공산당으로서는 이러한 그를 제거하려고 여러 차례 행동했으나 그가 수명의 경찰관의 보호를 받는 등 워낙 철저한 경계막 안의 생활을 했기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나 그 역시 전향자라면 으례 한번 겪어야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인지 자신의 저술에서 얻은 상당한 수입을 명월관·국일관의 명기들과 유흥하는데 모조리 써버려 한때는 장안의 탕아들을 무색케 한 적도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입한 장택상의 발탁으로 외무부 정보과장으로 등용돼 세인을 또다시 놀라게 했으나 장택상의 퇴임과 발맞추어 야인으로서 장택상에게 봉사했었다.
박은 그 뒤 49년4월20일 당시 종로 2구에서 출마한 장택상의 선거 사무장으로 일하던 중 남로당원 저격범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날 박은 수표동 장씨 집에서 선거 대책을 의논하고 나와「지프」로 중앙극장 쪽 골목을 돌아갈 무렵, 돌연 나타난 괴한이 쏜 총에 가슴을 맞고 숨진 것이었다.
저격범은 남로당 특수 행동 대원 정인옥과 박병천으로 연루자 15명이 사건직후 모두 검거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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