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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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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동오 특파원 긴급인수-게재】13일 아침 중라인민공사로 가 북경요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오리의 양육과정을 구경했다.
이 양육장에선 모든 알을 기계로 까서 부화일자별로 방을 나눠 키우고 있었으며 마지막 15일간은 성장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오리들의 입안으로 「호스」를 넣어 강제로 먹이를 먹이고 있었다. 양육장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일관 공장이었다.

<수공으로 양탄자 직조>
안내인은 이렇게 해서 부화 60일만에 오리들이 요리에 적합할 정도로 완전 성장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어 돌아 본 양탄자 공장에서는 「디자인」에서 직조까지 모든 과정이 수공이었으나 완제품은 아주 두껍고 아름다웠다.
저넉에는 「서커스」공연을 관람했다.
14일 아침 우리는 「버스」를 타고 배로 3시간쯤 달려 「바렐링」에 도착, 만리장성(천유관)을 보고 이어 명왕묘와 지하묘소에 안내됐다.
l7명의 명황 중 13명이 묻혀 있는 묘는 산 가운데 분지처럼 꺼진 곳에 있었으며 그중 3대황제 영락의 묘가 가장 크고 장엄했다.
58년에 발굴됐다는 지하묘소는 명14대 만력황제(1573∼1620)의 묘였다.
1천l백95평방짜리 넓은 지하공동은 5개의 거대한 「홀」로 돼 있고 천장은 기둥이나 서까래없이 들이 묘하게 이어져 있었다.
나의 남편은 간밤에 잠을 잘못 잔 탓인지 목이 빳빳해지는데다가 통증마저 있어 이날 「호텔」에 돌아와 전속 여의에게 침을 맞았다.
양의인 우리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안내원이 굳이 권해 시험삼아 한번 맞기로 한 것.
여의는 증세를 묻더니 남편보고 웃통을 벗고 바지도 걷어올리라고 지시한 뒤 침대에 뉘었다.

<영어 잘하는 의사들>
그리고 양손의 첫째와 둘째손가락사이 목뒤·다리 앞쪽에 차례로 바늘을 꽂았다. 손가락사이엔 1개씩, 목뒤엔 3개, 다리엔 2개를 꽂았다.
손가락의 바늘은 1「인치」쯤, 다리의 침은 뼈 근처까지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별 효험이 없는지 남편은 여전히 목이 풀리지 않았다.
여의는 『너무 시간이 지나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치료비만은 무척 싸 5각(2.5센트)밖에 안 받았다.
16일 우리는 한 병원을 방문했다. 기구는 모두 구식이었지만 이들의 의술은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하루 5백명의 외래환자를 받는다고 했다.
이 병원도 우리가 본 다른 병원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잘하는 의사가 3, 4명 됐다. 아마 외국에서 의학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의사들의 봉급은 미화로 1백20「달러」쯤 된다고 했다.
북경에서의 마지막 날인 17일 우리는 지하철을 타보고 하궁과 중공 최대의 동물원이 있는 이화원을 참관했다.
지하철은 깨끗했으며 승객들도 질서정연하게 행동했다.
하궁은 청조말에 불탄 뒤 당시 해군함경 건조비로 남겨두었던 은화 1억냥을 들여 새로 지었다는 설명.
정원에는 거대한 「쿠민」호가 있고 호수 맞은 편에 장수산이 있었다.
추운각·상춘각·들배·17개의 「아치」가 있는 옥대교 등 외모로 보나 이름으로 보나 아름다운 구경거리가 도처에 산재해 있었다.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일반 관광객도 떼를 지어 몰려와 함께 구경을 했다.

<진미 7가지 오리요리>
이화원은 청조 때부터 있던 곳으로 현재 3백종에 2천여 마리의 각종 동물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날 저녁 우리는 북경의 사회 지도자들의 초청으로 오리전문 요릿집 북경고압점(전문대가32호)에서 중공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가졌다.
냉채로 시작된 이날 요리는 일곱 가지 오리요리는 맨 처음 내장 및 똥집 튀김이 나오고 이어 볶음·구운 통오리·오리뼈 탕 등이 차례로 나왔다.
오리요리 사이엔 계란의 노른자위를 빼내고 대신 겟살을 넣어 계수나무의 노란 꽃처럼 볶은 계화해육과 날오징어알「수프」인 회오어정 등 진귀한 일품요리가 끼여 나오기도 했다.
식사 끝에 나온 「디저트」중 「파인애플」을 잔잔하게 썰어 맹물에 끓인 뒤 얼음사탕을 푼 빙당피 나는 더욱 감칠맛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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