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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와 고독의 나날|귀국 홍만길씨가 전하는-「사할린」동포 억류 30여년의 생활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사할린」에 억류된 4만여 교포들의 생활장이 다시 생생히 알려지고 있다. 지난1일 31년만에 고국땅을 밟은 홍만길씨(46)는 30여년 동안 민족적 차별대우화 역경을 딛고 고국에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할린」억류교포들의 최근의 생활과 현지사정을 소상하게 전했다. 억류교포들은 전후에 비해 생활 형편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고국을 그리는 망향의 집념은 날이 갈수록 더욱 짙어져가고 있다는 게 홍씨가 전하는 최근의 실정이다.
해방전까지 대부분 탄광노무자로 하루 10여 시간씩의 고된 갱내작업을 해야했던 교포들은 이제 농사도 짓고 미장원 등 점포도 갖게돼 근근히 독자적으로 생계를 이을 수 있게 됐다.

<67년 이후 차별완화>
한국교포들에 대해 격심한 민족차별을 해오던 소련당국도 지난 67년부터는 차별대우를 완화, 교포들이 텃밭에서 생산한 일년감동야채와 과일을 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조금씩 저축을 하는 교포들도 늘어났다.
송환된 홍씨의 경우, 해방이된 뒤 얼맛동안 소련군에서 통역을 맡아오다가 틈틈이 「퍼머」기술을 배워 미장원을 꾸리는데 성했다. 해방된 지 2년만인 47년도부터였다.
홍씨의 미장원은 주로 소련군 장교, 조종사들의 아내들이 단골로 드나들어 그런대로 재미를 보았다. 이들 군인들 아내들은 돈 대신 설탕·식량 등을 주어 홍씨는 이것을 팔아 수입을 올렸다.
노동 생활하는 교포들은 최근에 들어 한 달에 1백 「루블」∼2백「루블」 (1백「루블」 은 약5만원)의 노임을 받을 수 있게돼 한가구가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 1만 「루블」까지도 벌일 수 있게됐다.
억류교포들의 주업은 농업. 생활의 기틀이 잡힌 교포들은 대부분 소련인들로부터 통나무집을 사들여 그런 대로 「마이홈」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67년 이후 소련당국이 쌀을 수입해 들여와 식생활도 한국인의 입에 맞는 쌀밥으로 바꾸었다. 잡초 밭을 일군 채소밭에 배추 등을 심
어 김치도 담그고 된장을 만들어 먹기까지 됐다.

<명절앤 모여 잔치도>
00여년을 좁은 섬에 동포들이 모여 살다보니 결혼으로 친척관계도 생겼다. 그래서 연줄을 따지면 2백여명쯤은 친척이 되고 사돈이 됐다. 생일이나 혼인 등 경사스런 잔치,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 때는 친척들이 모여 돼지를 잡고 떡을 해먹는 우리 고유의 풍습도 되살아났고 아리랑의 흥겨운 가락도 불러 같은 핏줄끼리의 명맥을 이어왔다는 것.
경제적 생활의 터는 교포들의 뼈저린 고생 끝에 잡혀가고 있는 한편으로 이들에 대한 민족적 차별과 사회적 압박은 좀 처럼 가셔지지 않았다. 소련통치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소련국적을 취득하라는 압력을 받았었다.
종전 후 일본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무국적자로 취급받았는데 일본인은 모두 본국으로 들아가고 남은 한국인들만 무국적자가 되었다.
무국적자는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고 직장도 얻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여행이나 이주의 허가고 받을 수 없었다.
국가병원에서는 이들에게 치료조차 해주지 않고 여관도 국가에서 경영하기 대문에 무국적자가 투숙하려 면방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
하기 일쑤. 국적이 없는 한국인들은 노동을 할 때도 값비싼 물건을 취급하거나 창고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고 허드렛일만 맡아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홍씨도 무국적자란 이유로 58년부터 병원을 그만두어야 했다. 홍씨는 그 후 세무서·경찰서 등에 뇌물을 주고 무허가로 첫 과업을 해왔다. 또 의사를 매수해 허위 진단서를 만들어 병을 치료한다는 구실을 붙여 여행허가증을 간신히 얻기도 했다. 「사할린」에서도 돈은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제약 때문에 일부 한국인들은 소련국적을 얻기도 하고 1957년께 북한영사관이 이 곳에 진출하자 일부는 북한적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국인들은 끝내 국적을 얻지 않고 무국적자로 남아있다. 이런 교포는 주로「오오도마리L (대박) 「도요하라」(풍원)등지에 모여 사는데 3전5백여명쯤 된다는 것이 홍씨의 추산.

<거기서도 돈이 만능>
무엇보다도 자녀들의 교육이 문제. 전문학교나 대학을 가고 싶어하는 자녀들 이울며 매달려 국적 취득을 애원해도 조국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 무국적자들의 집념은 끝내 꺾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소련이나 북한의적을 얻지 않고 온갖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
65년쯤 동경에서 「사할린」귀환 한국인회장 박노학씨로부터 이들 무국적 교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가 왔다.
『한국과 소련이 국교가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를 통해 교섭중이다. 귀국할 날은 조만간 반드시 온다. 조속히 해결안 되는 원인은 귀국비용을 한국정부가 부담하느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늦어지고 있다.』이 같은 소식에 접한 교포들은 곧 귀국하는 기분에 들떴다.

<질환될 날만 고대>
어떤 사람은 집을 팔고 재산을 정리하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그 후 별다른 진전이 없자 이들은 모두 실망을 맛보았지만 아직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사할린」의 한국인들은 외교적 교섭이 성공해 귀국질이 트이면 고국에 돌아가기 위해 비용을 마련해 놓고 송환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홍씨는 전했다.
홍씨는 고국으로 들아 가기 위해 일본인 여자와 2번 결혼했으나 실패, 3번째의 지금의 부인「이또·지에꼬」와 결혼, 일본으로 가는 길이 트였다.
홍씨가 귀국 준비를 할 때 현지경찰은 홍씨의 처를 불러 『귀국을 위해 거짓 결혼한 홍씨를 처벌할 테니 동의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오오도마리」항구에서 홍씨가 귀국길에 오를 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 무국적동포 수십명이 눈물로 전송을 해주었다.
이들이 일본인과 결혼해 귀국하려해도 결혼상대가 없을 뿐아니라 가족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재혼할 수도 없는 처지.
소련국적을 얻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모스크바」유학을 시키는 등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반면 이들 무국적 한국인들은 경제적으로 하류층에서 허덕이면서 차별대우를 참아가며 고국에서 데려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기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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