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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벼랑 끝 사람들, 그들의 버팀목은 가족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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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신성식
선임기자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잔인한 질문이었다. 신문사에 찾아오는 것을 결심할 때까지 고심을 거듭했을 텐데, 거기 대놓고 냉정한 질문을 던졌으니.

 “깨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세요?”

 “내 식구인데, 버릴 수는 없잖아요. 희망이 있건 없건….”

 최근 본사로 손님들이 찾아왔다. 식물인간 남편을 간병하는 세 아내들이다. 이들은 ‘세브란스 동기’다.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에서 남편들의 재활치료를 돕다가 만났다. 앞 대화의 주인공은 나이가 가장 많은 홍용희(68)씨다. 홍씨는 2001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72)을 13년째 지키고 있다. 일수로 따지면 오늘이 4412일째 되는 날이다. 입으로 숨을 못 쉬어 목을 절개해 호흡을 하고 배로 영양을 공급한다. 의식은 없다. 씻기고 닦아주고, 대소변을 받아낸다. ‘나를 느끼겠지’라고 믿을 뿐. 5~20분 단위로 가래를 빼줘야 해서 24시간 곁을 떠날 수 없다. 간혹 외국에서 식물인간이 깨어났다고 하면 귀가 번쩍 뜨인다. 그런 희망의 끈을 잡고 버틴다. 홍씨는 “버릴 수는 없잖아요”라는 대목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동행한 딸도 흐느꼈다.

 두 명의 50대 방문객의 남편들은 2004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10년째 남편을 지킨다. 한 사람은 너무 힘들어 5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지난달 중순 충남 당진시에서 발생한 식물인간 아들과 아버지 동반자살 사건이 이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홍씨는 “희망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죠. 사람인데 그런 생각 안 하겠어요?”

 이들의 바람은 거창한 게 아니다. 뇌수술 환자는 건강보험 진료비를 5%만 내는데, 이들에겐 그런 혜택이 없다. 세 사람의 남편들은 막힌 뇌혈관이 숨골 근처라서 원천적으로 수술을 할 수 없는데도 그렇다. 월 200만원 안팎의 간병비, 병원을 벗어나 가정에서 돌보는 환자한테는 맥을 못 추는 건강보험, 환자 상태를 감안하지 않는 장기요양보험의 획일적 서비스, ‘왜 그리 사느냐’고 따지는 듯한 주변의 시선 등이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 홍씨는 월 250만원이 들어간다. 50대 부인은 서울 잠실아파트를 팔았다. 과거 10여 년의 인고의 세월에 나라의 존재는 미약했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7일 열린 정책토론회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지난 3년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극단적 선택을 한 141건의 사건을 분석해 공통점을 이 한마디로 요약한 거다. 여기에는 사업실패·생활고·의료비·간병 등의 고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런 사건은 장애인·노인 가정에 많이 발생했지만 보통 가정에도 적지 않았다. 누구한테나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벼랑 끝 사람들이 세상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잘 드러나지 않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복지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저 ‘비싼 병원비’가 두렵다. 만약 이들이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가게 되면 사회적 비용이 더 든다. 가족이 떠안은 덕분에 복지 지출이 줄어든다. 하지만 가족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끝이 안 보이면 극단적 선택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내년 복지예산이 처음으로 100조원을 넘게 된다. 홍씨와 사각지대를 외면하는 한 100조원은 공허한 숫자놀음일 뿐이다. 가족이 포기하기 전에 손을 잡아줘야 하는데, 도통 우리 정부와 정치권은 기초연금 같은 ‘큰 복지’ ‘폼 나는 복지’에만 매달려 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의 이라크 관련 유명한 말 “모른다는 것조차 모른다(unknown unknowns)”가 떠오른다. 보건사회연구원이 분석한 141건의 사건들은 알려진 것들이다. 우리가 모르는 홍씨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각지대에 놓인 희소병 환자만도 10만 명이 넘는다. 혹시 우리는 벼랑 끝 사람들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 아닐까. 알면서도 예산 부족, 인력 부족 등의 핑계를 대는 것일까. 벼랑 끝에서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는 원동력은 가족애다. 무한한 가족 사랑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들에게만 맡겨 계속 부양의 굴레를 씌우면 100조원보다 더 중요한 가족의 가치를 훼손하게 될 것이다.

신성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