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러분을 고국으로 데려가겠다" 서울방송 듣고 눈물 흘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30여년 동안 단절됐던 사할린 교포들의 생활상이 한겹씩 벗겨지고 있다. 31년 동안의「사할린」억류생활에서 풀려난 홍만길씨(46)가 일본을 경유, 1일 고국 땅을 밟은데 이어 해방 후 처음으로 억류「사할린」교포들의 생생한 생활상을 담은 사진이「사할린」억류 귀환 한국인회장 박노학씨 앞으로 도착하면서 기다림과 지침의 생활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있는 억류동포들의 생활상이 하나씩 하나씩 알려지고 있다. 홍만길씨는 4만여「사할린」억류교포 가운데 71년7월 손치규씨(73·전북 고창군)가 귀환한지 2년만에 두번째로 돌아온 교포이다.
홍만길씨(46)는 지난 2월 일본에 도착, 호적 정정과 친척방문을 위해 1일 하오1시30분 KAL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이날 회색양복과「노타이」차림에 누런색「트렁크」와 검은「백」을 들고「트랩」을 내린 홍씨는 마중 나온 여동생 만년씨(34)와 4촌형 만동씨(52)틈에서 어머니 이성녀씨(75·경기도 양양군 원당면 사리243)의 모습을 보자 왈칵 달려들어『불효자식 용서하세요』라고 한마디 외치고는 잠싯동안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이씨도『이렇게 살아올 줄은 꿈에도 못 생각했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홍씨는 공항을 나오면서『조국이 그리웠던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두 손을 들어『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충남 강경이 고향인 홍씨가 징용에 나간 것은 43년5월, 이때 홍씨의 나이 16세였다.
홍씨는 당시「가라후도」의 혜수취에 있는 탄광에서 보름쯤 노무자로 일하다 탈출, 날품팔이를 하면서 지내다 품삯관계로 일본인 감독을 때려죽인 죄로 형무소에서 종전을 맞았다.
소련군이 진주한 뒤 감옥에서 나은 홍씨는 치과와 미장원을 하면서 생활의 터전을 잡았으나 고국에 돌아갈 길이 막연했다.
지난 64년 홍씨는 10살 위의 벙어리 일본여자와 결혼, 귀국을 서둘렀으나 그해 대부분의 억류일본인들이 귀국할 때도 관계 당국의 무성의로 실패, 69년 현재의 부인「이또·지에꼬」(44)와 재혼, 지난 2월2일 일본으로 돌아왔다.
홍씨는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일본적십자사에『일본당국의 요구에 의해 탄광노무자로 갔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고국의 노모를 만나게 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내고 한국 영사간에도 이 사정을 호소했다.
홍씨는「사할린」에 있는 동포들은 민족적 차별 속에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종전 후 화태 일본인들이 귀국할 때 고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했었고 지난 69년1월 화태의 여러분을 곧 데려가겠다는 서울방송을 듣고 모두 울기도 했다는 것이다.「사할린」동포들은 소련의 통치 아래서 무국적자로 취급받아 직업에 제한을 받는 등 생활형편이 어려운 편이라고 했다. 홍씨는 그나마 간이시험을 거쳐 칫과의 자격을 얻어 개업, 그동안 일화로 1천여 만원의 돈을 모을 수 있었으나 일본으로 나올 때 소련 당국이 제한, 3백60「루블」(한화 16만여원) 밖에 갖고 나오지 못했다. 처음엔 모두 뜨내기 노동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던 교포들도 최근에는 대부분 농업에 종사, 일년감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러 생활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교포들은 그동안 고기와 빵을 소련 음식으로 생활해왔으나 최근 소련이 쌀을 수입해 입에 맞는 쌀밥과 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홍씨는『외교적 절충만 잘되면「사할린」교포들이 자기들이 번 돈으로 여비를 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에 홍씨는「사할린」에서 함께 지내던 이교명씨(72)로부터 친척들에게 소식을 전해달라는 부탁도 받고 귀국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