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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첫 중공방문 한국인 나순옥 여사의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만혼권장…남자28세에>
인구가 무려 8억을 넘는다는 인간 포화국 중공은 한국에서처럼 산아제한을 권장 「둘 낳기운동」이 한창이었다.
도시든 농촌이든 피임약은 무료제공이고 만일 셋째 아기가 들어서면 유산을 강력히 권장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대답을 안해 모르긴 하지만 낙태수술도 권장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또한 농촌을 장대로 대대적인 가족계획사업을 벌이고 『나중에 낙태를 하기 전에 미리 아기를 갖지 말라』는 교육도 시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결혼도 남자는 28세. 여자는 25세 이후에 하도록 만혼이 권장되고 있었다.
이 같은 인구조절효력은 장담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듯 요즘의 젊은 여성들은 대개 1∼2명의 아기만 갖고 단산을 한다는 것이었다.

<여인들 출산휴가 54일>
여인들의 출산휴가는 54일로 비교적 넉넉하게 주고 있었으며 월급도 그냥 다 나온다고 한다.
짧은 기간에 겉만 보았지만 생활수준은 그렇게 향상되지 않은 것 같았다.
우선 전기가 농촌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전열기구 등의 보급률이 극히 낮은 것으로 보아 중국전체가 흥청 흥청 전기를 쓸 형편은 못되는 것 같았다. 가정연료도 북경 등 대도시에선 일부 「개스」화가 되고 있었으나 농촌은 우리와 같은 부엌에서 구공탄과 알탄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체제 탓인지 개인은 아무도 승용차를 가질 수 없게 돼 있어 「마이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시엔 「아파트」같이 정부에서 지은 집이 많았다.

<고기도 일부선 배급제>
그러나 대개 「커튼」도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탄 「요트」와 기차에는 근사한 「커튼」이 쳐져있었다. 쌀과 옷은 모두 배급제로 공급되고있고 일부 도시에선 고기도 배급이 된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날마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 먹고사는 생활은 된다는 말이다.
길고 두터운 젓가락과 사기제 숟가락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중국영화에서 보는 우아한 고전의상은 「파티」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영농은 이제 기계화의 초보를 걷고있었다. 광동 등지에서 몇 개의 농장을 가봤는데 아주 농촌에는 「트랙터」가 1∼2대밖에 없어 보였다. 그것도 보통의 큰「트랙터」는 흔치 않고 소형이 많았다.
벼를 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는 수확기가 생산되고 있다고 한 당국자는 말했으나 그걸로 농사를 다 짓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손으로 하는 것이 많았다.
광동 집단농장에서 본 농가의 변소는 우리네 농촌의 측간과 똑 같은 것이었다. 땅을 동그랗게 파고 발만을 걸쳐 그 위에 올라앉도록 돼있는 전통적 측간-. 수세식밖에 모르는 동행부인들은 기겁을 할 노릇이어서 안내원은 광동 시에서 집단농장에 가는 도중 단 한군데 있는 수세식변소에 일부러 차를 세우고 용변을 미리 보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중국 하면 흔히 「만만디」를 연상하게 되지만 시민들의 걸음걸이는 역시 「만만디」의 느림보였다. 더위의 소산인 것 같았다.

<외국인 구경하는 군중>
우리일행을 보는 몇몇 도시시민들의 태도에서는 그동안 중공의 담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항주와 상해에서 당한 것이 그것.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 서서 피는 중국인이지만 서양인차림인 우리일행을 구경거리나 된다는 듯 멍하니 쳐다봤다.
특히 상해에서는 오랫동안 외국인을 보지 못한 때문인지 어디를 가나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우리 일행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들은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따라오다가 상점에라도 들어가면 뒤따라 들어와 대 혼란을 이루곤 했다.

<수세식변소 볼 수 없고>
이런 점은 외국인이 비교적 많이 드나드는 광동 사람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들 친절했으며 언제나 도와주러 애썼다.
시민들의 공중생활은 비교적 질서가 있어 보였다.
광동 대 극장에서 모택동 추앙 「버라이어티·쇼」를 보던 때의 일. 모든 출연자들이 노래와 춤·곡예 등을 열광적으로 연기해 「무드」가 고조될 대로 고조됐으나 일단 막이 내려지자 들어설 틈도 없이 빽빽했던 관중들이 언제 빠져나갔는지 5분만에 모두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공연히 서성대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5분 안에 극장서 퇴장>
이를 두고 획일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모두들 질서정연한 퇴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거리와 공원을 보아도 알수가 있었다. 도시의 거리엔 양옆에 가지런히 쓰레기통이 설치돼 있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길바닥엔 휴지 한 조각 떨어진 것이 없었다.
또 어디를 가나 아침부터 사람들이 밤낮 길을 쓸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자기 집 앞을 쓸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하옇든 거리를 깨끗이 하려고 애쓰고있었다.
우리 일행이 온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군인들 거리마다 많아>
공원을 가봐도 온통 깨끗이 단장하는 일손들로 붐볐다.
가지치는 사람, 풀을 뽑고 떨어진 이파리를 줍는 사람들이 저쯤이 멀다고 늘어서 일손을 눌리고 있었다.
공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분수는 있어도 물은 안 뿜고 있었다. 안 뿜는 것이 아니고 안 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중공은 없는 것은 없어도 사치는 하나도 없구나』하고 혼자 생각을 해보았다. 그들의 생활은 건실 그것이었다.
한편 중공의 거리는 「군인의 거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군인이 많이 눈에 띄었다.

<「타이깐」으로 짐 날라>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군인이 많은 데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거리엔 아직도 손수레와 당나귀 수레가 많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농촌에선 어디서나 「타이깐」(대간)으로 짐을 나르는 모습을 몰수 있었다.
가로수도, 많은 편이었다. 가로수는 항주에서 본 유명한 분재원에서도 많이 길러내고 있었다.
서호처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넓은 원내가 온통 수해를 이룬 이곳에선 몇 백년 묵은 나무들이 화분 안에 키가 조그마하게 길러지고 있었다. <계속><본사 조동오특파원 긴급인수-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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