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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몰린 아베 … 한국, 과거사 해결 기회 잡은 셈”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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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주년인 26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직전의 아베 신조 총리. 연미복을 차려입은 그는 작심한 듯한 표정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섰다. [로이터]

26일 아침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연미복을 꺼내 입고 최고급 은빛 실크 넥타이를 맸다. 멋쟁이들만 안다는 넥타이 딤플(dimple: 넥타이 매듭 아래 홈이 파이게 멋을 내는 것) 모양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한껏 차려입고 그가 간 곳은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소재 야스쿠니(靖國)신사.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이 합사된 곳이다. ‘어지럽던 나라를 태평하게 함(靖國)’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달리 야스쿠니는 전쟁의 신, 군신(軍神)을 모시는 곳으로 통한다. 현직 총리로서는 7년 만의 참배다.

 파장은 크다. 지난달 부임한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대사는 “실망스럽다”는 성명을 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주재국 대사관이 해당국 국가수반에게 ‘실망’이라고 표현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라며 “현장을 아는 대사관이 직접 비판 성명을 낸 것은 의미가 크다. 아베 총리로서는 본인이 환대한 케네디 대사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아베 총리로선 지난 1년간 나름 야스쿠니 참배를 자제해왔음에도 한·중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니 국내 지지세력이라도 결집하자고 잘못 판단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보수층 결집엔 성공했을지 몰라도 깜짝 참배는 일본 내에서도 지탄의 대상이다. 중앙SUNDAY가 접촉한 일본인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강한 우려를 표했다. 일본의 대표적 지한파인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65) 전 아사히(朝日)신문 주필은 28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참배를) 하고 싶어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정말 할 줄은 몰랐다. 매우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국제정치학계 권위자인 소에야 요시히데 (添谷芳秀·58) 게이오대 법대 교수는 28일 e메일을 통해 “아베 총리가 최근엔 자신의 우파적 경향을 억누르고 현실적으로 처신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는 데 놀랐다. 최근 일본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던 외교의 판을 뒤집어 놓은 처사이기 때문에 실망스럽다”고 했다. 소에야 교수는 최근의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외교 흐름의 예로 “(한·일 정상회담에 관한) 박근혜 대통령의 지나친 원칙주의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던 분위기 및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발표”를 들었다.
 
“일본 정부 차원 아닌 총리 개인의 결정”
극우 신문 산케이(産經)를 제외한 일본의 거의 모든 언론도 아베의 야스쿠니 참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 일본인 기자는 익명을 전제로 “외교의 기본을 무시한 비정상적 처사”라며 “타이밍이나 방법론상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난해 독도 깜짝 방문보다도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 처사다. 이대로라면 (일본 외교는) 위험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일본 내 북한 전문가인 고미 요지(五味洋治) 도쿄신문 편집위원은 페이스북에 “(참배 강행을) 이해하기 어렵다(理解しにくい)”는 글을 올렸다.

 아베 총리가 국내외 반대 파장을 예상 못했을 리 없다. 동서대 석좌교수이기도 한 와카미야 전 주필은 아베의 참배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아베 총리 개인의 결정이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외무성 내부에서도 (총리의 참배 가능성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가 있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정부 대변인격)도 반대했다”며 “그래도 총리가 꼭 해야겠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이었던 셈이다. 아베 총리가 독주한 것 같다”는 게 와카미야 전 주필의 분석이다. 실제로 스가 장관은 참배 당일 기자회견에서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에야 교수는 “아베 총리로선 참배를 강행할 계기도 없었으나 참배를 하지 않을 계기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실망했다”는 반응을 내놓은 데 대해선 “미국이 역사 문제에서 일본 편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대신 안보 문제에 있어선 항상 일본 편이다. 따라서 아베 총리에게 워싱턴 반응은 고려 요소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봤다.
 
이번 참배가 일본 사회 둘로 갈라
앞으로가 문제다. 와카미야 전 주필과 소에야 교수는 한목소리로 동북아 정세의 경색을 우려했다. 소에야 교수는 “한국인들은 일본 내에서도 아베 총리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번 참배 결정은 일본 사회를 둘로 가르고 있다. 양국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건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문화 및 민간 교류는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와카미야 전 주필도 이번 참배 사건이 오히려 한국으로서는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해결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라는 데 동의했다. “아베 총리로서도 국제사회에서 상당히 곤란한 입장이 될 것이고, 그 손해를 회복하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 그때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면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만회할 수 있다는 점을 한국이 잘 활용했으면 한다”며 “한국이 과하게 감정적 반응을 하면 일본의 일반 국민들도 외교 문제는 잘 모르지만 반한 감정이 커질 수 있다. 냉정한 대응을 희망한다”고 했다.

 이번 참배를 오히려 일본에 대한 외교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그 효과를 극대화하라는 제안들이다. 차분한 실용주의적 대응을 주문한 셈이다.

 한편 익명을 원한 한 남성 패션 전문가는 “넥타이 딤플 중에서도 가장 멋을 부린 스타일로 통하는 ‘피에고리네’ 딤플을 선택한 걸 보면 ‘패션을 통한 표현(fashion statement)’이라는 말이 있듯, 아베가 작정하고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고 전했다. 넥타이 모양이 아니더라도 아베가 총리 취임 1주년을 맞아 벌인 이벤트가 야스쿠니 참배라는 점은 그의 외교 스펙트럼을 가늠케 한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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