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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25」의 교훈|대표집필 양흥모 <중앙일보논설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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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차원 높은 연구>
6·25동란 23주년. 이제6·25는 보다 폭넓게, 깊이, 차원 높게 재평가해야할 단계이다.
지금까지 6·25의 조사·연구는 역사적 자료에 대한 증거설명에 치중된 느낌이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나아가 학술적인 기초연구와 더불어 국가안보이론·전쟁 학·전략체계 등의 면에서 검토되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와 민족이 걸어가야 할 좌표를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함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의 역사적인 여러 전쟁경험과 6·25의 여러 사례를 전략적으로 비교하여 해석해봐야 할 것이요, 거기서 한국 나름의 토착적인 전쟁교리의 개발과 정신자세의 확립이 필요하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6·25때의 평양전투와 임진왜란 때의 평양성의 공방전을 비교 분석해봐도 좋을 것이다.
또 충북의 수안보는 6·25때 북한의 작전총사령부가 있었던 곳이지만 수 백년 간 남에서 배상하는 것을 막는-지정학적으로 항시요새가 돼 왔다는 점도 주목해야한다.
또 강원도의 파로호 지역은 임진왜란 때의 격전이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 시급하게 요구되는 자주국방이론의 요체도 바로 이러한 연구에 근거를 두어야할 것이다.
또한 전사는 전략전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인간수양의 경전이다. 전사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싸움터의 실상을 감득 할 수 있다. 동시에 사활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발휘되는 상황판단·인내·용기·희생·봉사정신·지도원리 등은 비단 군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교훈이 될 수 있다.

<제한전의 성격>
역사적으로 국난을 극복한 사례 또한 많다. 6·25는 민족의 일대 수난. 그를 검토하여 교훈을 찾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유명하고 특색 있는 동서고금의 전사는 많지만 우리가 6·25를 다시 평가하며 그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의 자세를 가다듬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요긴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6·25에 대해서는 누구나 할말이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1950년 6월25일 고요한 일요일 새벽4시. 북한은 전면 기습남침을 감행해 왔다. 그로부터 3년1개월3일에 걸친 대 동란. 온 강토는 불바다가 됐고 남북한 인명피해는 수백만, 재산피해는 천문학적 숫자에 달했다(별항 참조).
6·25는 누구 때문에 일어났으며, 그때 어떤 참극을 당했으며, 그때 무엇을 했는가 등 동 누구나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한마디로 6·25는 소련과 중공의 사수아래 북한이 남한적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의 사용이었다. 일찌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라고 말했지만 6·25야말로 정치목적의 달성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폭력적인 공공연한 무시전술이었다.
6·25는 세계사상 유례없는 복잡 다양한 배경과 전쟁기술, 그리고 전략이론이 혼용되어 구사된 전쟁이다.
시대적인 배경을 보면 동서 냉열전 시대의 열전이었다. 이른바 「얄타」체제이후 냉전이 구조화되면서 양극이 대립, 마침내 한국에서 그것이 전쟁으로 터진 것이다.「이데올로기」면으로 볼 때는 자유 대 공산주의의 싸움이요, 세계사적으로 본다면 「유엔」의 전쟁이었다. 또한 전쟁형태를 보면 작전목적이나 규모가 제한된 제한전쟁 또는 국지전쟁이었다.
비정치적인 순수 전쟁이론으로 볼 때는 전쟁초기 북한이 사용한 전법은 서구의 전통적인 전쟁방식, 다시 말해 소련 식의 전법을 사용했다. 그와 반면 우리는 미국식인 전쟁방법을 썼다.

<동기는 남한적화>
6·25는 왜 일어났던가.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남한을 적화하려는데 있었는데 최근의 학계연구를 보면 6·25는 소련의 직접 책동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바꿔 말하면 북한이 소련에 남침지원을 요청해서 일으켰다는 논지이다. 이는 「흐루시초프」회고록에서도 나타나있다.
1949년 북한의 최고위층이「스탈린」과 만났을 매 남한을 일격 하면 봉기가 일어나 자연 공산화된다고 말함으로써 「스탈린」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세력팽창정책을 비롯해서 오래 전부터 남침준비를 해 왔을 뿐더러 세밀하고도 전면적인 전쟁완수 준비를 한 것으로 보아 소련이 주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6·25남침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소련의 새로운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남한을 그 발굽아래 넣으려는 책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적반하장 격으로 6·25를 남한이 일으켰다고 덮어씌우는 선전을 일삼고 있다. 6·25도발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북한의 이러한 대외 선전 공세는 국제적인 학계의 이론적 뒷받침이나 학술적 고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이는 북한의 상투적인 대외선전에 불과하다.
북한의 이러한 선전은 6·25를 직접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들을 필요도 없이 6·25의 기습, 그 이전의 철두철미한 전쟁준비, 소련어로 된 작전명령, 6·25 바로 그날의 박일우(당시내상)의 연설, 6월26일 북한 최고위원의 연설, 그밖에 당시 외국신문의 보도와 논평, 「유엔」결의, 「트루먼」회고록, 「흐루시초프」회고록- 이런 몇 가지 문건만 들춰봐도 환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북한이 구차스럽게 허위 선전을 하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전쟁도발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스」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할 때 「폴란드」국경에 있는 독일방송국을 위장 「폴란드」군인들로 하여금 습격시키고 독일의 진격이「폴란드」의 도발 때문이라고 선전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만주침략이나 중·일전쟁의 노청교 사건만 하더라도 전부 중국인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그대로 통할 수는 없는 게 뒷날의 역사이다. 인간은 거짓을 믿을 만큼 우둔하지 않은 까닭이다.
둘째로 북한은 그러한 선전을 함으로써 남침의 목적을 합리화하고 6·25의 막대한 피해와 더불어 북한 동포의 불만을 무마하러했다. 「루덴도르프」는 그 옛날 독일이 패망한 것은 정당한 전쟁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쟁목적이란 적개심을 앙양,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매우 긴요한 것이다.
특히 6·25와 더불어 북한의 피해 또한 극심했다. 자기들이 일으킨 6·25남침의 대가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 억지를 써서라도 자기들이 도발한 것이 아니라고 우겨. 북한 사람들을 기만할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째는 대외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성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6·25는 소·중공·북한의 3자 연합전선 형식으로 남침한 것이다. 6·25를 자기들이 일으키지 않았다고 선전하는 것은 북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소련·중공도 마찬가지이다.

<안보확립의 교훈>
6·25는 우리가 침략을 당한 것이다. 북한이 남침을 하리란 것은 사전에 예측되었었다. 요컨대 북한에「탱크」가 돌아오고 비행기가 돌아왔다는 정보를 알면서도 아무대비가 없었다.
6·25가 일어나던 바로 전날 육본에서는 심야 「파티」가 있었다. 장병들은 휴가 중이었다.
당시의 「트루먼」미국대통령은 「미주리」주 「인디펜던스」고향에서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당한 것이다.
당시 북한에 대비해서 대전차포만 준비하고 있었더라도 북한군의 진격을 쉽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군 수뇌설에서 미 고문관에게 「탱크」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한국과 같은 수전과 산악지대에서는 「탱크」가 부적합하다고 들은 체 만 체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애치슨」국무장관은 50년1월12일 「프레스·클럽」에서 한국은 극 동방 위선에서 제외된다고 선언했다. 그 보다 앞서 1947년9월 미 합동참모본부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의 철수를 결정했다. 그 이유는 미국은 한국을 방위할만한 충분한 군사적 이해관계가 없으며 미국은 전면적으로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한미군을 다른 곳에 재배치해야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힘의 진공 상태는 물론 한국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의 과소평가는 결국 공산측의 침략야욕을 자극하게 되었다.
또한 해방이후의 국내 정치의 혼란, 특히 6·25직전의 5·30선거가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단합이 결여되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군사문제도 몰랐고 경험도 없었다. 북한이 한번 내려 밀면 남한이 당장 넘어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6·25의 교훈으로서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나 힘의 진공을 만들지 말 것이며 허점을 보여서 안 된다는 것이다. 외부침략자가 오단하지 못하도록 내실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6·25는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3년여의 6·25동란을 통해 우리 겨레들이 입은 인명의 피해는 무려1백만에 달하며 여기에다 군·경이 입은 피해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무려 2백만에 달한다. 재산상의 총 피해는 4천억 환에 이른다.
이같이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많다. 방위력강화, 자유수호의식, 방위의식, 반공의식의 함양 등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나라가 이러한 것에 철저하게 된 것은 바로 6·25 때문이며 그것을 직접 겪었기 때문이다. 안보란 국가의 가치질서를 유지 발전시키는 것인데 6·25는 그 가치관을 확립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안보와 국방에 있어서는 능력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의지의 확립 또한 중요한 것이다.
국방이란 영토·국민·주권으로 구성되는 국가를 지키는 것이지만 국가는 우리의 생명을 포함한 종합적인 생명체라는 데서 국가의 생을 지키는 것이다.
이 생명체에는 살려는 의지가 있으며 그것은 인간생활의 중핵이요 인간행동의 원천이다. 이 의지를 올바르게 계발·함양한다는 것은 안보나 국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국방의 제1선은 국민성이라 고하지만 제 민족·제 국가의 성쇠흥망은 국민의 내적 정신에 달려있다. 자주국방, 토착적인 군사이론, 국적 있는 교육이 요구되는데 6·25를 재평가하면서 정신자세의 확립이 강력하게 요청되는 소이는 이런데 있다.
충용한 국군장병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나라와 겨레 위해 몸을 바쳤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도리가 있다면 .그들의 현충 정신을 본받고 구현하며 또 계승시켜야 할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세월은 흘러 6·25당시의 내외여건과 지금의 상황 또한 다른 것이 있다. 국제정세를 보면 그 옛날의 냉전구조는 사라지고 협상시대와 더불어 대화가 한창이다.
전쟁과 긴장을 억지 함에 대화 또한 큰 전략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억지전략으로서 보다 중요한 것은 힙의 유지이다. 힘의 유지와 대화는 현금 세계에 있어서 억지전략의 쌍벽을 이루고있지만 대화가 있다고 해서 힘을 홀시 해서는 안 된다. 현재적인 위협이 없다고 잠재적인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며 정세는 유동적이다. 국가가 있는 한 군사력의 의의는 불변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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