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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첫 소련입국한국인 유덕형 씨 기행문|유덕형(자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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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모스크바」의 1주일은 모든 것이 새로운 체험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관념적으로 멀리만 느껴졌던 소련이라는 나라는 우리와는 체제와 주의가 다르고, 또 지난 28년간 「한국인」으로는 아직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그 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모스크바」공항에 내리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흥분과 환희를 전신에 느꼈지만, 반면에 공포와 불안을 내내 떨어버리지 못한 채 엿새 밤을 지샌 것도 사실이다.
그 공포와 불안이란 그들이나를 어떻게 해서가 아니고, 내 선입관과 그 사회의 분위기가 은연중 어떤 강박감으로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연극통한 해빙에 큰 의의>
입국 때는 옛 동창인 「필리핀」대표 「세실·기도테」를 붙잡고 나와의 동행을 요청했었다. 출국 때는 「네덜란드」대표단 틈에 끼여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애 머무르는 동안은 「앨런·스튜어트」미국대표를 비롯한 여러 자유진영의 연극인들이 여러모로 보살펴 준 데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그 감사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마움뿐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또 더 나아가 평화를 사랑하는 한 한국의 예술가로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다.
또 그들은 유덕경이라는 나 개인을 도와주었다 기보다도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국제간의 이해와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 소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15차 ITI(국제극예술협회) 총회에는 42개국으로부터 7백여 연극인들이 참가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연극발전의 경향』을 주제로 5윌27일부터 6월1일까지「모스크바」중심 가와 노총회관에서 얼렸는데, 물론 이 같은 국제회의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번 회의는 현대의 연극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 특히 제 3세계연극의 문제가 진지하게 토론되고 제기됐음은 주목할 만 하다.
대회 마지막 날인 각국 대표의 자유연설 시간에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소련정부가 한국국민에게 입국허가를 내린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것은 소련이 이번 예술문화를 통해 국제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에 크게 기여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북한사람 만난 인상 강렬>
그러자 장내에는 한동안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고 어떤 대표는 나에게 달려와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이번 대회에서 더욱 컸던 의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 1주일간「모스크바」에 머물렀던 여행자로서 소련사의의 전체적 인상을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나라가 조직적이고, 전체적이고 획일적인 사회임에 틀림없지만. 그 속에서도 세계와 통하고 자유와 통하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와 오랫동안 인조 적으로 만들어진 이질적 요소들이 차차 깨어져 이제는 서구적인 요소와 혼합된 어중간한 상태가 아닌가 느껴졌다.
또 「모스크바」에서는 동양적·내향적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소련이라는 땅 덩어리가 「유럽」과「아시아」의 양 대륙에 걸쳐있듯 그들의 얼굴은 백인도 아니고 황 인도 아닌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중간같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그들의 옷이나 거리의 색감에 있어서도 다른 구미지역에서 느낄 수 없는 「동양적」인 체취가 풍겨왔다.
소련의 연극에서 내가 느낀 것은 연극 그 자체의 문제보다는 극장에서의 「리드미컬」한 박수였다. 그게 더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그 박수는 나에게 거북하게 느껴졌지만, 꼬리를 물고 계속 박수를 치는 가운데 무대와 객석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 같은 기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대중을 획일화하는 무서운 힘이었고, 그래서 극장이란 의식으로 승화된 장소라는 것을 절감케 하는 종은 체험의 기회였다.
또 하나 인상에 남는 것은「모스크바」에서 한국인 2세를 만난 것이다. 앞서도 잠시 소개한바 있지만, 그는 한국도, 한국연도 모르는 소련인인 데도 왠지 그에게서 상국에 대한 향수 같은 게 전달됐기 때문이다. 또 그와의 만남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에 융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순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이 내 가슴에 맺히게 한 커다란 응어리는「모스크바」그 자체보다도「모스크바」에서 북한사람들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과의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었고, 소련사람들을 만날 때 보다 도리어 더 긴장했어야만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우리들의 비극은 내 마음속에서 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고 민족적인 문제이며, 더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인 것이다.
비록 짧은 1주일이었지만, 그 1주일은 나로 하여금 가장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 아마 내 생애에서 가장 길었던 1주일이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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