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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일 양국어에 공통점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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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문학자 김사엽 교수는 일본의 계간지 『조일「아시아·리뷰」』하계호에 기고한 글에서 고대 한·일 양국어의 관련성 내지 공통점을 구체적으로 예시했다. 한·일 고대관계사의 문제제기 특집에서 고사기·일본서기·만엽집 등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 가운데 기재된 한국어에 관해 발표한 김 교수는 삼국시대 한국인과 일본인사이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었지 않겠느냐는 데까지 그의 추리를 유도했다. 전경북대 교수인 김 박사는 현재 대판외국어대학 객원교수로서 일본에 체재중이다. 다음은 그 논문의 요지이다.
고대 신라 백제 고구려 사람들과 일본인들과는 서로 빈번히 왕래하면서 군사·정치·문화상 교류를 가졌음에도 한·일 양국간에 언어상의 장애가 문제시된 것은 7세기말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7세기 후반까지 양국의 사서에 그런 문제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양국의 권력층 상호간의 접촉에 있어 공통어를 가졌던 까닭이 아닐까.
일본서기 웅략천황 7년조(463)에 『역어묘안나』, 또 천지천황 2년조(663)에 『거세신전신역어』 등의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역어」는 글귀의 전후 사실로 보아 중국어 「통역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7세기 후반부터는 통역관을 개재시키지 않고는 대화가 어렵게 됐음을 입증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일본서기 천무천황 9년조(681), 속일본기 순인천황 4년 및 5년조(759·760)에 신라어와 일본어 사이에 차이가 있어 「습언자」니 「습신라어」 등의 말이 나온다.
극동의 여러 민족들은 일찍부터 중국의 한문을 받아들여 문자를 써 왔다.
그런데 신라사람들은 단순히 한문을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한자를 응용해 자국어를 표기하는 이색적인 방법을 고안, 널리 일용문자로 사용했다.
이 방법은 일본에서도 취택돼 일본어를 적는데 있어 자국문학적인 기능을 했던 것이다.
한반도 한문이 수입된 것은 한사군시대에서 불교전래에 이르는 시기로 볼 수 있으며 4, 5세기께에는 삼국이 다 공용문에 한문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착적 성질을 띤 첨가어를 쓰는 한국인이 고립어인 중국어의 문자를 이용하는데는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사상·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그런대로 가능하다 치더라도 인명·지명·관직명 등 고유명사를 표기하는데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곧 한자의 음·훈을 빌어 표기하는 방법이다.
신라에 있어 왕호가 중국식으로 바뀐 것은 20대 소지왕때부터이며, 그 이전「유리」「납지」「거세간」「니사령」「마립간」등은 모두 신라어의 표현이다.
지명의 종국식 개정은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인데 당시 신구 지명을 비교해보면 「달구화(달구벌)→대구」 「모산(엄뫼)→운봉」 「사평(사평)→신평」 등과 같이 음차·훈차에 관한 어떤 표준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즉 ①고유명사의 표기에는 음차를 원칙으로 하고, ②음훈에 있어 음절모음부가 단순할 뿐아니라 한자의 음절 형태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해야 하며 ③되도록 한국어의 동일음절은 동일한자로 표기하고 있는 것도 일종의 법칙으로 주목할만하다.
경주발견의 6세기께 「임신서기석」은 한문을 우리말의 어순으로 나열함으로써 특이한 한문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 문체일 것이다. 이 서기체가 이두체·향찰체로 발전되는 것이다.
일본의 고사기 「천석옥호」에는 음차를 중점으로 하여 신라의 서기체 표현(예=협승나수·신집집이)이 삽입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만엽집의 「대반판상랑여비탄니리원사거 작가」가 향가의 경우와 같은 표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만섭집의 「가다까나」 문자가 신라의 표음한자와 일치하는 예가 허다하다.
아(아) 이·이(이) 가·가(가) 고·고(고) 사(사) 시(시) 소·소(소) 다(다) 지(지) 두(두) 도·도(도) 나·내(나) 노(노) 파·파(바) 비·비(비) 부(부) 보(보) 마·마(마) 미(미) 무(무) 모(모) 나·양(라) 리·리(리) 유·루(루) 노(로) 야(야) 의(에) 등.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일본서기에 나오는 허다한 고유명사는 일본화되지 않은 고대한국어임을 밝힐 수 있다.
이것은 나아가 사실에 매우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며 혹은 이제까지 분명치 않던 의문점을 푸는데 요긴한 방증자료가 될 것이다.
그 대표적 실례로서 도내인의 성씨인 「소아」 혹은 「등원」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아의 본뜻은 「웅신」·「왕」이다.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추신」「신웅」「해모수」 등은 부여·고구려에 있어서 남신 즉 「수검」이다.
삼한에서도 웅신을 제사하고 그 장소를 소도라 했다. 「소아」는 「소컴→소커→소가」의 와음이다.
「등원」는 한반도의 남쪽 「비자벌」에서 온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남창령의 옛 이름은 비자수 부사국·비사벌·비자발인데 일어로는 「히시호」로서 광명한 땅을 뜻한다.
「등원」는 비자수의 고대 음에서 「후지하라」(포치파량)로 와전된 것임이 추정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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