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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뒤흔든 집권당 뇌물스캔들 종교운동가 귤렌 수사 배후 의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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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에르도안(左), 귤렌(右)

전 세계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교육운동 ‘귤렌운동’의 창시자, 2008년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 사상가 1위(미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 온라인 설문조사), 달라이 라마·넬슨 만델라·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수상한 만해평화상의 올해 수상자….

 이 수식어들이 가리키는 이는 터키 출신의 저명한 종교운동가 페툴라 귤렌(72)이다. 그의 이름이 익숙하지 않더라도 그가 창시한 ‘히즈메트(또는 귤렌운동)’는 현대 터키를 거론할 때 종종 등장한다. 관용 정신을 기치로 실용 교육을 장려하는 ‘히즈메트’는 수십 년간 추종자를 양산해 터키 정·관계와 기업·미디어 분야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귤렌은 1999년 반정부 혐의로 기소된 뒤 미국에 자진 망명해 현재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이 귤렌의 이름이 최근 터키를 뒤흔들고 있는 정치스캔들에 등장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집권 ‘정의개발당(AKP)’의 대형 뇌물수수 사건과 관련해서다. 검·경이 국책사업 입찰 비리 등 혐의로 국영은행장과 건설업 재벌 등 50여 명을 전격 체포하고 이 가운데 24명을 구속한 사건이다. 구속자 가운데 내무·경제부 등 현직 장관 3명의 아들들도 포함됐다. 사실상 정권에 반기를 든 수사에 에르도안 정부는 수사를 지휘한 경찰 고위직 등 5명을 파면하는 등 맞섰다.

 그러면서 에르도안은 이 사건을 “더러운 음모”라고 주장했다. “해외에 있는 책략가들이 배후에 있다”고도 했다. 25일(현지시간)에도 “종교의 가면을 쓰고 우리나라를 조종하려는 특정 집단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웅변했다. 정치평론가들은 이런 발언이 귤렌을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귤렌의 검·경 인맥이 수사를 주도했다고 에르도안이 의심한다는 것이다.

 귤렌과 에르도안은 원래 세속주의 군부 정권에 대항해 협력하던 관계였다. 그러다 2003년 이후 에르도안이 총리 3선 연임에 성공하며 점점 독재화하자 사이가 벌어졌다. 지난여름 반정부 시위 후 심화돼온 갈등은 에르도안 정부가 지난달 ‘교육 평등주의’를 명분으로 귤렌 측이 운영하는 입시학원을 폐쇄시키자 극에 달했다. 추종자들의 기부로 운영되는 이들 학원은 ‘히즈메트’의 주 수입원이자 인재 양성소 역할을 해왔다. 학원 폐지에 반발해 일부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당의 내분은 깊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스캔들이 내년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에르도안과 귤렌 측의 알력 다툼이 분출된 것으로 본다. 에르도안은 세 번 이상 총리 연임을 금하는 당규에 따라 내년 8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미국에 있는 귤렌은 변호사를 통해 “이번 일이나 관련 수사관들과 티끌만 한 이해관계도 없다”며 배후설을 전면 부인했다. 그는 에르도안이 “썩은 생각”에 빠져있다고도 말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25일(현지시간) 분위기 반전을 위해 부총리 1명과 장관 9명을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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