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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휴전회담(후반부)(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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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반공포로 석방은 포로자신들과 군·경, 일반국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수행되었다.
휴전조인이 임박함에 따라 석방 D「데이」를 부랴부랴 6월18일로 잡았기 때문에 실행계획이나 탈출방법 등에 대한 연구에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국민의 뜨거운 협조와 군·경의 불철주야의 분투로 모든 애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수용소 철조망 밖까지의 탈출지원은 헌병총사가, 시내에서의 안내와 보호는 경찰이, 석방포로들의 수용은 인근 주민들이 각각 분담하여 체포하러 나온 미군들을 모두 따돌렸다. 헌병총사가 지령한 포로들의 탈출방법은 ①모포를 철조망에 걸치고 뛰어 넘는다. ②사전에 철조망을 절단해 놓은 후 대거 탈출한다. ③작업 때 탈출한다 ④수용소 안의 전등을 파괴한 후 야음을 이용, 탈출한다. ⑤지하 굴을 파고 나간다는 등 다양했고 신호는 공포나 「플래쉬」를 사용토록 했다.

<도지사와 경찰에 협조지시>
수용소 「접수」형태를 취해 석방작전을 총지휘한 헌병 총사령부는 6월18일 아침6시 중앙방송국 전파를 통해 원용덕 장군이 직접 육성으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 반공포로 석방을 기정 사실화했다.
『본직은 4286년6월18일 0시를 기하여 관하지휘관에게 한인애국포로수용소 접수를 명하였다. 본직은 신성한 조국주권의 존엄성의 유지를 위하여 이를 명령하였으며 이는 국제공법인 「제네바」 협정 총칙 제12조에 의거하는 것이다. 본직은 한국민의 열화 같은 민족정기에 호응하여 이를 감히 실천하는 바이다.
그 결과는 「유엔」제국가의 이익에 공헌 있을 것을 확신하며 선열의 의지를 계승하여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북진통일을 전취하려는 한민족의 자유권의 엄숙한 발동임을 내외에 선언하는 바이다.…후략』
원 사령관의 담화가 발표된 몇 시간 후 이승만대통령은 『전략…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국인 포로를 오늘 6월18일자로 석방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엔」군 사령관과 또 다른 관계양국들과 충분한 협의가 없이 이렇게 행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다 알 것이다.
각도지사가 경찰관리들에게 지시하여 이 석방된 포로들을 아무쪼록 잘 지도 보호케 할 것이니 다 그 직책을 수행할 것으로 믿는 바이다. …후략』라는 성명을 발표, 포로석방의 대외적인 책임을 전적으로 지고 나섰다.
또 당일 변영태 국무총리서리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서한을 보내 『그동안 한국정부가 반공애국포로들을 석방하자는 태도를 오래 전부터 표명해왔던 바 이제 부득이 석방조치를 취하였으니 이에 동의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이같은 성명과 서한들을 통해 한국정부는 의연히 반공포로 석방의 정당성을 대외적으로 선언했다.
그러면 6·18석방 당시의 탈출체험담을 반공포로들로부터 계속 들어보겠다.
▲최창관씨(당시 마산수용소반공포로=현 경남 창원군 웅남면 거주·53) <나는 51년8월 북한 공산군에 강제징집 됐다가 그해 10월19일 평남 중화에서 미군에 포로가 됐읍니다.< p>

<탈출 명령받고 신발신고 대기>
52년 봄 거제도에서 면회심사를 받고 부산∼영천수용소를 거쳐 53년 초 마산수용소로 왔읍니다.
6월17일 저녁 여단본부로 각 소대장들을 집합시킵디다. 그들이 돌아오더니 내일 새벽1시 석방이 되니 신발을 졸라매고 대기하라는 거예요.
나는 이 얘기를 듣고 기쁘기도 했지만 간부포로들이 무슨 폭동(?)을 일으키려는게 아닌가하는 의심도 품었어요.
밤12시쯤 창문으로 내다보니 사중으로 된 철조망이 끊겨 있읍디다.
각 소대별로 철조망을 나와 진주를 향하고 산중턱쯤 오르니까 신호탄이 오르면서 미군들의 저지사격이 개시되데요.
진동고개에 올라서니 대기하고 있던 순경이 수고를 했다면서 빨리 진주 쪽으로 가라고 합디다. 새벽5시쯤 진북 지서에 도착, 지서주임의 안내로 한 면에 50명씩 배치를 받아 농민으로 가장해서 보리밭에 나가 보리를 베는척하며 지내고 있으니까 이틀 후에는 도민증을 보내주더군요.>
▲한봉림씨(당시 부산가야수용소 반공포로=현 논산읍 거주·43) <나는 50년10월11일 북한공산군 군관학교에 입교, 1주일만에 북진해오는 「유엔」군의 추격을 받으며 후퇴하다가 평남개천에서 포로가 됐읍니다.
부산가야수용소에서는 감찰대원을 하고 있었는데 6월17일 밤 국군 연병대에서 시단장을 비롯한 전 포로간부들을 소집, 탈출지령을 하달합디다.
각 대대장들은 밤12시가 되니까 중·소대장들을 불러 대원들을 취침시키지 말고 옷과 신발을 신은 채 비상 대기토록 지시를 하구요.
이때 우리 감찰대는 힘센 대원들만을 차출, 헌병대에서 갖다준 절단기로 순찰하는 미군헌병들의 눈을 피해가며 수용소 철조망을 끊었읍니다.
새벽2시 국군헌병들의 「플래쉬」신호를 따라 일제히 탈출했고 우리 감찰대원들은 막사를 샅샅이 뒤져 낙오자들을 모두 내 보낸 후 맨 마지막으로 뛰쳐나왔어요.
탈출지령에는 집결지가 없고 나가서 시내 아무 민가에나 들어가면 잘 보호해 준다고만 돼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가야수용소는 환자를 비롯한 약간명의 미탈출자가 생긴 외에는 사상자 한명없이 모두가 성공적으로 탈출했읍니다.
나는 수용소에서 나와 어떤 민가의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더니 잠자던 젊은 부부가 깜짝 놀라 깨면서 웬 사람이냐고 묻데요. 사정을 얘기하니까 옆에 가면 국군부대가 있으니 그리로 가라는 거예요. 그 집을 나와 비가 내리는 캄캄한 밤중에 헤매다보니 날이 샜는데 수용소 쪽에서는 미군들이 공포를 마구 쏴대고 가야 뒷산에는 미군기들이 떠서 기총소사를 가하고 있읍디다.
국군공병대로 달려들어갔더니 한 상사가 자기 「헬멧」을 벗어 씌워주고 명찰까지 떼어 붙여준 후 「버스」를 태워 부산경찰서로 데려다 줍디다.>

<숨겨준 인연으로 딸과 결혼도>
▲최용회씨(본인요청으로 가명)=(당시가야수용소포로·반공청년단 제2지부조직부장=현 서울 거주·45) <나는 6·25당시 김일성 대학 공과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공산군 징집을 기피해 숨어 다니던 중 50년8월2일 정치보위대 부원에게 붙잡혀 전선복구대원으로 징용을 당했어요. 충북 영동지방까지 내려와 작업을 하다가 후퇴 때 보은군 삼승면 지서로 들어가 자수를 했으나 미군한테 인계돼 포로가 되고 말았읍니다.
가야수용소에서는 우리 반공포로들이 국군헌병들을 통해 신문을 구독, 휴전회담진행과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석방시위를 벌이니까 미군당국은 포로들을 5백명 단위로 분산 수용합디다. 그래도 간부포로들이 미군경비망을 뚫고 개천이나 하수구를 타고 한밤중으로 각 수용소로 들어가 동지들을 설득, 매일같이 일제히 「데모」를 벌이자 6·18석방 29일전인 5월20일 미군당국은 나와 김병후 동지 등을 비롯한 반공포로대표 10여명을 모두 영창에 넣어버립디다.
이렇게 돼서 가까스로 빠진 강응인·변형옥 동지 등이 밖으로 반공통일연맹 이사장 이광형씨와 접선을 해가며 계속 석방시위를 했고 나머지 간부들은 모두가 감방에 갇혀 버렸어요.
미군은 우리 간부들을 모두 중범으로 취급, 독방에 수감시킨 후 용변을 핑계로 변소를 드나들며 각 수용소에 손짓연락을 한다고 급식 때 국이나 물도 거의 안주데요.
18일 새벽1시쯤 국군헌병들이 우리들 감방문을 따주면서 『너희들은 이제 살았다. 빨리 나가라!』고 소리를 칩디다.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줄로 알고 모포·식기들을 챙겼더니 헌병이 발길로 엉덩이를 차면서 몰아내데요. 나와 보니 철조망이 뚫려 있고 동료들은 이미 거의 다 탈출했더군요.
수정동 어느 민가로 들어가 있다가 18일 밤10시쯤 도민증을 받고 도경서 나온 형사의 안내를 받아 다시 범일동으로 이동, 고물상을 하는 박봉학씨(고인)댁으로 갔읍니다.
나는 이 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는데 이것이 인연이 돼 7년 후 그분 따님과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읍니다.>

<분산해있다 거의 국군에 입대>
▲이학선씨(당시 광주수용소 반공포로=현 제주시 거주·45) <나는 50년8월 해주에서 북한 공산군에 입대, 경남 합천지역 전선에 투입됐다가 9윌25일께 미군한테 포로가 됐읍니다.
거제도수용소에서는 미군 전범조사처 연락장교인 김선호 중위(현미「테네시」 주립대교수)가 동향인이라고 잘 보살펴 줘 무사히 지냈는데 52년4월 광주수용소로 오니까 적색수용소였던 제78여단서 왔다고 의심을 하데요. 그래서 거제도 78여단에서 공산당과 싸우던 이준걸씨와 나는 행세를 못했어요.
6·18에는 철조망을 미리 끊어놨다가 공포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탈출했는데 내가 있던 제3수용소쪽은 미군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별 희생이 없었지만 제1, 제2 수용소는 미군의 저지발포로 약간의 사상자가 났어요.
탈출한 우리 반공포로들은 각 면으로 분산 배치돼 한집에 2, 3명씩 들어가 농사들을 도와주며 지내다가 8월말께 대부분이 국군에 입대했읍니다.>
◆주요일지(1953년3월17일∼20일)
※17일 ▲40대의 B-29, 한만 국경 남쪽의 병사폭격 ▲공산측 휴전대표, 미군기가 개성 폭격했다고 비난
※18일 ▲신익희 국회의장, 국군급식개선강조 ▲영하원, 대「유고」원조안 가결
※19일 ▲대통령저격미수범 김시현·유시태에게 사형구형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사이공」방문
※20일 ▲「브랜디」전 태평양미함대사령관, 한국전에서의 원폭사용역설 ▲소 정부, 북한이 납치한 10명의 영국인 석방을 알선하겠다고 영 정부에 통고 ▲「말랜코프」당 서기 사임. 후임에 「흐루시초프」
◆알림=「민족의 증언」 문의나 연락은 전화(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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