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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탈출 전 홍위병이 폭로한 체험 수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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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 다니고 있는 제팔 중학교에서는 모두 56명이 홍위병으로 뽑혔다.
완장을 두른 우리를 홍위병은 이제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가「사구 파괴 활동」을 시작했다고
사구란『낡은 습관』·『낡은 풍속』·『낡은 사상』·『낡은 문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제까지의 길거리 이름이나 장점·영화관의 이름을 새로 바꾸고 간판도 때려부수고 절도 부수기 시작했다.
또한『흑 오류』에 속하는 지주·부농 반혁명 분자·악질 분자·우파 분자 등의 집을 습격, 약탈하기도 하였다.

<매일 같이 파괴 활동>
이와 같이 매일 파괴 활동을 하고 있던 중 8월8일 중국 공산당 제8기 11중전 회에서 문화혁명은 모택동 주석이 직접 지도하고 있다는 내용의 발표문이 우리들에게 전달, 일주일간에 걸쳐 이를 열심히 학습하였다.
발표문이 실린 신문이 달아 찢어질 정도로 학습을 하던 나는 당 중앙의 지도자로『모 주석의 지시를 무시하고, 공작 조를 이용하여 대중운동을 탄압하는 악질 분자가 있다』라는 지적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
『누구란 말인가? 설마 제2인자인 유소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고 혹시 북경 시장인행진을 규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중『문화혁명』이 자분 주의의 곁을 걷고 있는 당내의 실권파를 축출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월에 들어서 나를 포함한 팔 중의 홍위병 대표 8명은 홍위병 경험 교류의 계획에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북경으로 가는 도중 상해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는데 상해 의과 대학 구내에 나붙은 벽 신문에서 당의 총서기인 등소평이 공공연하게 규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절강성에 들어갔을 때도 그랬지만 안휘성에 들어와 보니 역마다 걸식하는 부랑자들이 들끓고 있었다.
경찰이 이들에게 무료 승차권과 약간의 돈을 쥐어 주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내몰고 있는데 이들은 돈을 받으면『모 주석 만세』하고 소리치고 곧 돈이 수중에서 떨어지면 이번에는 『모택동 아버지는 개자식』이라고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지쳐서 실신하는 자도>
북경 시가의 높은 건물의 붉은 벽에는『중공의「흐루시초프」를 타도하자』라는「슬로건」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유소기를 규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몹시 놀랐다. 옆에는 유소기의 처인 왕광미와 등소평을 규탄하는 문구도 보였다.
우리 일행은 청화 대학교의 숙소에 들게 되었는데 이곳은 전국 각지에서 온 홍위병들로 꽉 차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8일째 되던 날 새벽, 갑자기 요란스러운 구두 발짝 소리와 함께 탕탕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경비병은 오늘 모택동 주석의 환영 식이 있으니 모두 준비하라고 지시 사항을 알려주었다.「비스킷」과 과일 배급표를 손에 쥔 우리들 일행은 새벽5시에 숙소를 나와 행렬을 지어 도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몸에 스며드는 찬바람은 살을 에는 듯 하였다. 옆의 한 동료는 옷을 엷게 입고 있어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제대로 걷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외투를 벗어 주었다.
몸이 약한 듯한 한 홍위병이 걷다가 지쳐서 그 자리에 쓰러지자 경비병은『이 친구 재수가 없군. 모 주석을 만날 팔자가 안돼는 군』하면서 신랄한 그를「트럭」에 실었다.
이윽고 우리들이 당도한 곳은 북경 공항, 청화 대학에서 이곳까지는 20km가 넘는 거리였다.
넓은 광장에 운집한 홍위병들은 이때나 저 때나 모 주석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산 마루로 해가 넘어가려고 할 때야 모택동이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약간 입술을 내민 모택동은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올리고 몇 번 흔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작달막한 키에 고양이 허리같이 웅크린 임 표가 모택동 어록을 손에 들고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큰 닭이 나무를 쪼는 소리로,『홍위병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모 어록 돌고 임 표 미소>
홍위병들은『모 주석 만세』라고 소리쳐 외쳤고 나도 따라 몇 번이고 외치는 바람에 목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청화 대학 구내에서 머무는 동안 잊혀지지 않은 것은 유소기의 처인 왕광미에 대한 규탄이었다.
구름이 잔뜩 낀 음산한 날씨에 바람이 일어 흙모래가 얼굴에 날아오는 가운데 왕광미는 창백한 얼굴로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이날의 규탄 대회를 지휘한 홍위병 소대 부는『자본가 계급 분자인 왕광미를 인민과 대면시키기 위해 이곳에 끌어 왔다』고 선언하고 왕광미에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다그쳤다.
그러자 다른 홍위병이 나서서 유소기와 왕광미가 63년에 동남「아시아」제국을 순방했을 때 호사스러운 의복과「하이힐」, 값진 보석들을 샀다고 규탄하고 특히「캄보디아」에서「시아누크」와 히히닥 거린 왕광미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창백해진 왕광미 규탄>
그는 또 왕광미가 출국할 때에 모택동의 처 강 청에게서『자본주의 물건』들을 사 오지 말도록 지시를 받았는데도 이를 어겼고 귀국해서는 강촌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이듬해인 67년 1윌 북경을 떠나 하 문으로 돌아온 나는 보안 망에 대해 지반을 주동, 하 문의 공장 감독을 추방하고 생산 본부장이 되어 활약을 했었다.
그러나 홍위병의 투쟁도 끝나고 새로 들어 닥친 성 혁명위원회가 학생들을 내쫓고『공인 모택동 사상의 부도』라고 불리는 노동자들이 학교에 진주하여 홍위병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것이다.
그리고 학생 지도자들을 체포, 인민 재판이 시작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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