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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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드디어 서울이 야광상투를 꽂았다. 남산꼭대기의 소주병. 그것은 밤마다 문명을 과시했고 나도 그만큼 악담을 했다. 차라리 전기가 모자랐던 시절이 그리울 만큼이나.
이제는 그보다도 간판에 깔려 죽을것만 같은 서울에 현깃증이 난다. 우리가 과연 흰옷을 입고 백자를 굽던 조상들의 자손일까? 모두가 색치가 돼버리고 말았나보다.
하지만 그 간판 홍수 속에 보기 드문 것이 하나 있다. 책방광고간판이 그거다. 가까운 일본은 한사람 앞에 책 3권만 꼴이고 우리는 2천명에 20권 남짓 하다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몇해 만에 모교에 갈 일이 있었다. 대학가 주변이 어떻게나 근대화했는지 한참 벙벙했지만 그 많은 장점 가운데 책방은 하나도 없어 신기했다. 무심코 양장점 간판을 세다가 40이 넘을 땐 정말 아찔했다.
교문 앞은 완전히 양장점 박람회. 펀지 부치러가다가 훌쩍, 더러는 시장바구니를 든채 담배 가게 드나들 듯 쉽게 들르는 책가게. 벼르다가 사는 책도 있고, 읽지도 못하면서 갖고 싶어서 사기도 했던 파티생활.
때로는 비오는 날, 실컷 눈요기만 하고 그날도 마음 편히 가게를 나오곤 했다. 대학 가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책방·옷가게·구두 가게·레코드 가게. 붐비는 젊은이들 틈에서 언제 어떻게 찌들었는지조차 모르는 나를 두고 울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단속을 받으면서까지, 세계물결에 뒤질세라, 민감한 장계들이 찾는 것은 저런 것이 아닐텐데. 그래도 겉치례가 1차적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우리말에「헛기침」이라는 말이 있다. 『입은 거지는 얻어 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 먹는다』는 말도 있고. 우선 입었으니, 이제 책방들이 간판만 크게 내걸어 주면 그곳으로 갈텐데….책방 간판이 아쉽다.
되게 시간이 걸릴거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니 비약도 있었다. 그 어느날 남산꼭대기의 원수 소주병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것처럼.,
조상이 남긴 것이 허세 뿐만은 아니겠지만, 허세면 어떠냐.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책방을 찾는 허세라도 가져보자.
이 세상에서 주부들이 가질 수 있는 그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한 우리에게 단 한가지 「무료한 시간들」. 우리는 그걸 가졌다. 그 시간들이 어째서 주어졌는지는 아예 따지지도 말자. 다만 그 무수한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김치에 찌든 천덕꾸러기를 알뜰한 주부라고 자위만 말고 책방간판을 찾아 우리도 한몫 허세를 부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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