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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10년의 기복|「당사」가 기록한 사건들|창당 10돌 맞아 스스로가 본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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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공화당이 창당 10주년을 맞았다. 63년2월 정치활동이 재개되면서 창당의 깃발을 올렸던 공화당의 당사는 바로 한국정치 10년의 단면이기도하다.
네 차례에 걸친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치르면서 집권당으로 「온존」돼온 공화당은 내외로 숱한 시련과 파란을 겪어왔다.
창당의 주역이었던 김종필씨의 「자의반 타의반」의 거듭된 외유, 뒤이은 공직사퇴, 한국 복지회 사건, 3선 개헌파동, 10·2항명사태, 10월 유신에 따른 국회해산과 정당활동중지 등 기복은 허다했다.
당 주도권을 둘러싼 파벌간의 대립과 반복, 이로 인한 당세의 동요도 작지 않았다.
창당 10주년을 맞아 공화당에서 내놓은 「민주공화당사」는 10년간의 기복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줄거리만 추려본다.

<가칭 재건당의 발기와 창당>
신당의 조직을 위해 63년1월10일 발기인이 될 12명이 제1차 모임을 가졌다. 오후3시 서울세종로 삼영「빌딩」4층에 마련된 임시 사무실에 모인 김종필 김성기 김정렬 김동환 김재순 김원전 박현숙 서태원 윤일선 윤주영 이원순 조응천씨는 임시의장에 윤일선씨, 임시대변인에 윤주영씨를 선출하고 『4·19로 비롯되어 5·16으로 승화된 혁명이념을 계승하여 혁명과업을 민주주의적 질서 하에 수행해야 할 신당 출현의 필연성을 확인하고…이에 따라 과거의 정당, 파벌에 구애됨이 없이 인물 중심으로 성실성에 중점을 두고 포섭범위를 확대하여 범국민적인 정당을 지향키로 한다』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첫발을 내디디었다(당사는 정당활동재개전의 사전조직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창당 준비위총회는 2월25일 하오1시 서울시민회관에서 5백7명의 준비위원 중 3백90명이 참석한가운데 열려 그동안 상임위원회에서 심의한 강령안, 기본정책안, 당헌안, 창당선언안 등에 관한 보고를 듣고 다음날 개최할 창당대회의 진행순서를 논의, 결정했다. 이 총회가 한참 열리고 있는 같은 시간에 창당준비위원장직을 사임한 김종필씨는 『텅 빈 마음속에서 그래도 믿기지 않아 그대에게 외치며 나는 떠나리. 그 많은 상처 입고도 나는 이 생명 다하여 따뜻한 그대품안에 길이 묻히리』라는 즉흥시 한 수를 남기고 외유의 길을 떠났다.

<장 부의장 발언과 김 당의장 사퇴>
65년4월27일 장경순 부의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김종필 당의장이 공직에서 사퇴하는 것만이 현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현 책임을 당 총재인 박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밝혔다 (당의 이완조직과 당 우위에 대한 반발 등이 원인이 된 당 내분의 표면화다).
장 부의장의 이와 같은 건의의 공개는 박 총재로부터 『나의 결단도 기다리지 않고 건의를 공개한 것은 구 정치인들의 수법이 아니냐?』고 노여움을 사게 되었으며 당내에서는 당내대로 지도체계와 당기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 기구의 공식절차를 통하지 않고 자의로 당 지도체계에 대한 도전이 될 중대한 내용을 일방적으로 건의, 공개함으로써 반발을 사는 결과가 되어 급기야는 이와 같은 장 부의장의 행위를 해당행위로 규정짓고 징계론까지 대두되는 가운데 전국 각처에서 규탄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한·일 회담을 반대한 6·3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 당의장은 6월 5일 당의장 사표를 내고 18일 2차 외유의 길에 올랐다).

<김종필 당의장의 공직사퇴>
68년5월24일 당기위원회는 제5차 당기위원회를 열어 「한국 국민복지연구회」에의 관련으로 김용태(당무위원)·최영두(중앙상임위원)·송상남(당원)을 제명했다. 「한국 국민복지연구회」는 그 조직포섭 과정에서 훈련을 이수한 청년 당원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당내의 조직에 혼선을 가져오게 했다.
김용태 의원의 제명이 확정되자 정가에는 71년의 정국과 관련된 파다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며칠 후인 5월 30일 재무회의가 토의 안건을 모두 마친 뒤 김종필 당의장은 당무위원에게 『김용태 의원 제명이후를 필요한 잡음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하고 『본인의 신상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대통령각하를 잘 모시고 일사불란한 체제를 확립해 주기 바란다』고 요망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이날 김종필 당의장은 당을 탈당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도 밝히고 부산으로 떠났다.(중략) 6월 2일에는 부여에 우송한 탈당계가 지구당에 정식으로 접수되고 탈당확인서가 발급됨으로써 탈당이 확정되었다. 김종필 당의장은 탈당과 모든 공직의 사퇴를 표명한 이후 공식으로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탈당이 확정된 후 부산에서 가진 기자와의 고별 회견에서 『당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그것을 나와 관련시켜 박정희 총재를 괴롭게 했으며 내가 공직을 사퇴하는 것이 박정희 총재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결심을 내리게 된 이면을 시사했다.

<영빈관 의원총회>
69년7월29일 상오11시 영빈관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개헌문제에 관한 최종적인 당론 확정의 절차를 밟게되었다. 28일 당무회의에서 결정한 개헌안 내용과 개헌안 처리일정을 놓고 1백9명의 소속의원 중 1백1명이 참석한 이날 의원총회는 오전11부터 다음날 새벽4시30분까지 장장 17시간30분에 걸친 열띤 토의와 격론을 벌였다.
의견을 발표한 30여명의 의원 중 윤치영 당의장 서리, 백남억 정책위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백두진 이병희 이병주 김봉환 김용순 노재필 이현재 정내정 의원 등이 개헌찬동발언을 했고 정구영 신윤창 오학진 김성희 윤천주 김우영 의원 등이 개헌반대의 입장을 표명했으며 특히 이만섭 의원 등은 개헌발의에 앞서 선행조건 5개항을 제시하고 이를 당 총재에게 건의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10·2 항명파동>
72년9월30일 국회본회의에 발의되어 10월2일 표결에 붙여진 오치성 내무장관 등의 해임 건의안은 부결시키라는 박정희 총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김학렬 신직수 양 장관의 해임 안은 부결되고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안만 가결되었다.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안 가결은 일사불란한 박정희 총재의 당령도 방식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박정희 총재는 「10·2 항명파동」이 발생한 이튿날 김종필 국무총리와 수습책을 논의한데이어 이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당에 지시했다. 이러한 박정희 총재의 의중에 따라 당무회의와 당기위원회를 잇달아 열어 주동인물로 지목된 길재호 정책위원회 의장과 김성곤 중앙위원회 의장에게 탈당을 권유하였고 이어서 두 당직자의 탈당굴가 소속지구당에 접수되어 의원직이 상실됐다.

<4인 체제와 반 4인체제의 마찰>
그러나 이때 정계일각과 일부 식자층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의 하나는 10·2 파동으로 『백남억 당의장, 길재호 정책위의장, 그리고 김성곤 재경위원장이 핵심「멤버」로 6대 국회후반부터 당내세력 주류를 이루어왔던 「4인 체제」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에 따라 박정희 총재의 친정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다른 한편은 『길·김 양씨의 의원직상실로 「4인 체제」가 붕괴되었다고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평소 「4인 체제」에 비교적 가까운 현오봉 의원과 구태회 의원이 원내총무와 정책위의장이라는 요직을 맡았고 이에 맞서온 「반 4인 체제」의 핵심「멤버」인 오치성 의원이 정권처분을 받았고 김재순 원내총무가 무임소 당무위원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라고 보기도 했다.

<역대 당의장>
초대=김정렬 2대=윤치영 3대=김종필 4대=정구영 5대=김종필 6대=윤치영 7대=백남억 8대=정일권 9대=이효상

<역대 사무총장>
초대=김동환 2대=장경순 3대=윤천주 4대=예춘호 5대=길재호 6대=오치성 7대=길재호 8대=길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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