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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열되는 「단군 조선」 논의-신문협회 주관 한국사연구 5차「세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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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신문협회주관 한국사연구위원회는 20일 서울신문 회의실에서 「단군 조선의 제문제」를 주제로 한 제5차 「세미나」의 속개 토론회를 가졌다.
지난번의 회의에 이어 단군 조선의 문제가운데 남은 문제, 즉 ⓛ단군 조선과 기자조선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②단군 조선의 문화단계는 신석기·육동기 중 어느 시대이며 그 연대는 어떻게 볼 것인가 ③단군 조선은 어떤 지역범위, 이것을 국가라 보면 어떤 영토를 가졌던가 하는 것이 심각하게 논의됐다.
단군 조선은 한민족국가기원의 문제와 연결된 때문에 중대한 문제를 안고있다.
그렇다고 한국사가 명확한 고고학적 문헌적 증거 없이 무턱대고 그 연원을 오랜 것으로 할수만도 없다. 종교적·교육적 의미에서 논하지 않고 순수한 학문적 냉정성에 입각해서 단군 조선을 논하는데도 그 어려움은 크다.
다음은 이날 토론자의 주장내용이다.
▲김정배(고려대)=단군 조선의 다음단계에 비록 기자조선은 아니라도 어떤 분명한 단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지역에는 고「아시아」인이 이룩한 유문 토기의 신석기시대가 BC 10세기 전까지 있었고 「알타이」 예맥계의 무문토기인이 청동기 문화를 BCl2∼13세기에 시작했다.
단군 조선을 신석기시대로, 기자조선에 해당하는 문화단계를 청동기시대로 보는 것이다.
「퉁구스」도 「아이누」도 곰 설화를 갖고 있는 것은 이들이 형성단계에서 고「아시아」인과 접촉했던 때문이다.
▲유승국(성균관대)=확실한 역사기록의 증거가 없는 시대, 가령 중국사에서 BC841년 이전시기에 대한 역사는 청대학자들에 의해 부정되었었다.
그러나 은대갑골문의 발견이나 천문학적인 고증에 따라 부정되었던 이 시대의 역사가 다시 인정되고있다.
상서에 나오는 월식의 기록이나 동이관계기록이 동작 빈의 『은대월식고』 등에 의해 날짜까지 밝혀지고 있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나오는 기묘년이 BC1122년임이 드러났으며 『제왕운기』의 기사에 나오는 『기자가 오기 164년전에 단군은 아사달로 들어갔다』는 말로 은호정년간인 1286년까지 단군 조선이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갑골·금문의 연구로 우리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원용(서울대문리대)
ⓛ단군 조선에 대한 문헌자료나 고고학적 유물은 뚜렷한 것이 없다. 확실한 것은 유문토기와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며 무문토기가 중국선사문화의 영향으로 나온다는 느낌이다. 이 시대 농경과 색채토기가 황하문화의 영향으로 인정되지만 우리의 「국가」의미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은 문화의 유입 흔적은 아직 없다.
②한 국가가 지배체제를 가질 때는 상형이든 설형이든 문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나라엔 문자를 쓴 흔적이 없으며 따라서 단군 조선을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청동기시대에조차 우리는 문자를 가진 증거가 없다.
③단군신화는 우리 민족 전체적으로 볼 땐 이질적 존재다. 평안도일부의 작은 부족설화가 고려시대의 국난을 거치면서 민족사상고취를 위해 건국신화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④단군신화는 건국신화로서 그대로 두어야하며 고고학이나 문헌으로 역사를 두드려 맞춰서는 안 된다. 성서의 창세기 전설을 날짜까지 맞추어 주장한 학자도 있으나 이는 곤란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김열규(서강대)=「알타이·샤머니즘」은 대체로 청동기문화의 영향이라고 「할버」가 밝힌바 있다. 단군신화도 청동기시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김정학(부산대)=단군은 신화로 해석해야한다. 그 신화는 태양신화·난생신화의 복합이며 곰 신앙도 나타나 있다. 「단군 조선」이란 명칭에 나는 찬성 않는다. 역사 기록이 없는 이 시대는 국가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하고 민족의식을 주는 방법으론 가능하다.
▲이용범(동국대)=①중국 선사시대의 조선은 한반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요동반도를 포함한 것이었다. 조선은 요하 근처의 여러 부족을 총칭한 것이었다.
②건국신화로서의 단군신화는 곰 숭배와 연결된 것만이 아니고 『제왕운기』에 나오는 것같이 목신숭배도 나타낸다.
③「시베리아」계의 단군 조선과 「알타이」계의 기자조선은 BC10세기께 중국의 삼황오제가 동시 존재한 것이라는 주장처럼 부족 병립상태로 지속한 것이다.
▲천관우=언어학과 고고학·신화 등의 연구는 당분간 두드려 맞추는 작업일지라도 계속돼야겠다. 가설의 종합이 필요한 것이다.
대담한 가설로서 나는 우리 민족의 슬기를 넷으로 분류한다. 부여·고구려·옥저족을 일계로, 단군족·기자족·해모수족 등 조선삼한의 일계로 본다.
「퉁구스」와 몽고족은 「알타이」산맥 남부에 공동의 근원지를 갖고 있다는 「슈미트」의 주장에 따라 단군신화에 나오는 쑥과 마늘을 해석하고 싶다. 몽고초원의 대표적 식물은 쑥과 부추며 부추는 염교·마늘과 거의 같은 식물이다.
따라서 단군 족은 협동기의 유입 「루트」와 비슷한 통로로 몽고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왔고 기자 족은 그 남부의 「루트」를 따라 들어왔다. 해모수 족은 더 북쪽대요의 주에 살았다.
이를 통틀어, 환웅 족이라 할 수 있는데 중국문헌의 동이다. 동이는 중국의 회수로부터 산동과 발해만을 거쳐 한반도에 퍼져 살았다. 단군신화는 농경이 시작된 시기의 유력한 어느 집단의 설화로 볼 수 있는데 이를 기초로 몇 가지 주장을 할 수 있다.
①단군 신앙은 뿌리깊은 것이며 신화는 선 주민의 것이기보다 우리 직계조상의 것이다.
②농경이 주이기 때문에 단군신화는 유문 토기인과 관련이 없다.
③환웅 즉 단군 족이 곰을 숭배한 것이 아니고 와보니 곰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선 주민인 유문토기인이 있었던 것이다.
④무씨사당 화상석의 설명에도 곰 숭배는 약하다. 곰 숭배는 고「아시아」인의 것이다.
⑤따라서 환웅족은 「시베리아」인이 아니고 「알타이」언어를 쓰는 북「몽골」인이다.
⑥BC3백년께 고대국가가 생긴 것으로 본다. 거주지역도 한 부족지역으로 좁게 잡을 수 있다. 당시의 주민분포는 실상 별 의미가 없다. <공종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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