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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청사기상감철채어문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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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우리 나라의 역대 도자기 가운데 가장 호탕한 기품을 가진 것이 분청사기이다. 4백년 전의 것임에도 오늘의 인상파 그림이나 추상화가 무색할 정도로 현대적 감각이 물씬 난다. 애써 정교하게 꾸미려 하지 않고 손길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그릇 표면에 분단장을 시킨 것이나 분을 긁어내고 혹은 철사로 그림을 수수하게 그린 점이나 아주 활달하고 여유 만만하다. 전문적인 각공이나 화사를 불러들인 것도 아닐 터인데 간결하게 생동하는 표현을 했다. 그래서 분청사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때의 도공들이 참으로 멋쟁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고려청자는 왕실과 권력자들의 귀족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최대한 정교를 가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왕조의 쇠망과 더불어 형편없이 퇴락 해 버렸는데 뜻밖에 새 왕조가 들어서자 여기에도 새로운 소망이 솟아났다. 바로 조선왕조의 새 기운이다.
이 기운에 힘입어 청신하고 순박한 탈바꿈을 한 것이 분청사기라는 독특한 양식의 도예품이다.
흙(태토)은 비교적 철분이 많은 까닭에 구울 때 그것이 거죽에 배어 나와 그릇 표면에는 약간 쑥색이 돈다. 또 흙을 곱게 수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거친 점을 숨길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위에 백토물을 씌워 감싼 뒤 그 일부를 긁어낸다든가 철사로 그림을 그려서 청자계의 투명 유약을 바르고 구워낸 것이다. 이 분장의 효과는 매우 서민적이고 자유로운 야취가 넘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청자에서 이조백자에 이르는 잠시동안, 즉 15, 16세기에만 만들어진 까닭에 현존 유물은 그리 많지 못하다. 금세기 초 일제가 도굴을 자행할 초기에 일인 골동상들은 처음 이 분청사기를 대하자 어리둥절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 뒤 얼마 있다가 일본의 삼도자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것을 「미시마」라 일컫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도 극소수 밖에는 분청의 진가를 깨닫지 못한 것 같다. 분청사기가 널리 성가를 높이기 시작한 것은 동란 이후이다.
이 상감철채어문호는 분청사기의 멋을 백분 드러낸 수작품이다. 몸통 전체에 백토물을 곱게 씌운 뒤 고기와 연꽃 부분을 긁어내고 다시 고기비늘을 백토로 상감했다. 그리고 쇠녹물로 고기의 지느러미와 연꽃잎 및 연판 무늬를 듬성듬성 표현했다. 충남지방의 출토품으로 전하는데 아깝게도 구연에 파손이 심해서 1년간이나 수리했다고 한다. 높이 26.7㎝. 황규동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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