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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부재와 창작정신의 황폐|김윤식 <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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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문학비평의 씨가 말라버린 한국 문학을 슬퍼한다. 어째서 요즘 단 한편의 비평도 쓰여지지 않는 것일까. 신 문학비평사전 과정을 통해서 볼지라도 매달 이만한 소설량이 있는 한에서 단 한편의 비평도 쓰여지지 않고 있는 현상은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다. 그 원인은 도처에 잠복해 있으리라. 이 비평부재에 대한 우려의 표명은 창작과 직결됨에 그 심각성이 더하다.
이 진술은 비평이 창작방향 지시에 직결된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어의의 가장 엄밀한 한도 안에서의 두 측면의 상보적 관계를 뜻할 따름이다. 실상 이 관계란 창작과 비평 두 측면이 공유하는 바의 문학에 대한 열정일 따름이다. 따라서 최근 문단의 비평부재는 비평 속의 열정(아픔) 부재이면서 동시에 창작 쪽의 그것을 함께 포함한다. 한쪽만이 온존된다는 것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양자가 몸이 한데 붙은 쌍생아이기 때문이다.
이 비평부재가 근래 문단에서 월평 내지 이 달의 화제라는 지극히 폐쇄적인 평론장치와 대응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은 이 시점에서 마땅히 비판되어야 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수년 전 이러한 평론장치가 고안되고 수행될 때 상당한 이유를 띠었고 따라서 그 성과도 나는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격적인 비평이 옆에서 건재할 때 비로소 긴장을 띨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평의 견제력이 상실될 때 다음 두 가지 문제점이 공허해 질 우려성에 봉착한다. 첫째는 창작정신의 황폐화에 관련된다.
작가들은 자기가 인식하고 있는 문학의식과 문학사적 문맥에서 바라볼 안목이 상실되기 쉽고 따라서 변동을 특질로 하는 현대문학에서 어차피 탈락할 운명에 처해질지 모른다. 당대의 평가를 도외시 할 정도의 도도한 작가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당대 평가가 유보상태에 놓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작가가 독자보다 더 민감하다든가, 똑똑하다는 근거란 아무 데도 없는 것이다.
최근 한때 1급에 속했던 전후 작가들(50년대)의 몇몇이 재등장하고 있지만 내 안목에 의하면 실로 실망뿐인 것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 이유의 일단이 비평에 의해 이어지는 섬세한 문학사적 모색의 인식불능에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인가. 40세가 넘어서도 계속 작가이기 위해서는 「역사에의 변명」에서 자기를 「무」의 상태까지 전락시켜야 할 것이다. 순간 순간마다 「신인」이 되든가, 아니면 아예 포기하는 쪽이 정직함에 속하리라. 둘째는 월평이 일방적으로 감행하는 월평 나름대로의 횡적 파악에 의한 인상적 비평이 창작의 현장성을 결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성찰이다.
매달마다의 작품이 동일한 범주로 평가될 때 창작의 「꿈」에 대한 근거가 상실됨은 삼척동자도 직감하는 일이다. 따라서 월평장치는 비평의 본문이 없는 한 오히려 해약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래 월평이라는 「서베이」양식은 「리뷰」의 기능에 속하는 것이며 그 발생적 근거가 비평이 건재할 때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비평부재가 작가 및 비평가의 정신의 광망을 함께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우려를 「직접적」으로 당해야 될 감계층은 누구인가. 자명하다. 편집자 계층인 것이다. 이 진실 속엔 무엇보다도 비평가들 자신의 무지가 내포된다. 동시에 우리의 질문 방식이 『너는 뭐냐』가 아니라 『한국문학은 뭐냐』로 던져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 나는 결코 건방진 말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한국문학사」다. 가령 이번 달의 작품 『전기』(조용만·「현대문학」) 의 「자리 매김」을 하려면 수년 전에 쓰여진 『백자도공 최술』(정오숙), 『황진이』(최인호)와의 문학사적 문맥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정치와 예술의 역기능의 역사적 파악이라는 과제에 관계된다.
『저 문밖에서』(백도기·「현대문학」)의 작품 역시 몇몇 작가에 의해 수년 전에 몇 번 되풀이 된 지극히 통속적인 주제에 불과하다. 의심스럽거든 직접 이들 작품을 찾아 읽어 보라.
특히 『장마』(윤흥길·「문학과 지성」)의 주제는 한국 작가 치고 한 번씩 시도해 보지 않은 자가 없었음은 조금이라도 계속 작품을 읽어온 독자라면 누구나 아는 일에 속하리라. 『치과 나들이』(서기원·「월간 중앙」) 도 『유랑』(유재용)을 이미 가져버린 문학사적 문맥에서는 앞서와 같은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실상 이러한 진술은 이 달의 서상한 몇몇 작품이 약간씩 다른 시점을 되풀이되는 주제에 첨가하고 있다는 문학사적 사실을 뜻하게 된다. 『치과 나들이』가 「직접적」인 지식인의 현실태도에 대한 파편적 반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장마』가 위압적인 저 「이데올로기」를 「샤머니즘」(구렁이)으로 무화 시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사건의 발단을 「샤머니즘」적 운명관으로 유폐시켜도 좋은가.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현실이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전기』(개화기)도 우리의 현실이며, 『조랑말』(일제시대)도, 『장마』(6·25)도, 『치과 나들이』(오늘날)도 이들 전부가 그 선후를 가릴 수 없을 정도의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것은 당대의 민족자아란 기억의 지평 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령 잠 안 들다』(신상웅·「신동아」)는 이 지평 전부를 「커버」하는 것이다. 이 복합적인 현실을 의식의 차원에서 질적으로 어떻게 소화하는가를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당대 작가의 임무가 아닐 것인가. 필시 이 차원은 「터부」(어떤 종류이든)에 대한 도전이며 따라서 위기의식을 동반하며 이것만을 나는 작가의식이라 생각한다. 그따위 문제의식에는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그것은 그의 자유에 속하리라. 다만 나는 한민족의 역사의식과 관련된 작가의 임무를 문제삼을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재외 한국인 현역작가특집」을 읽을 임무나 평가 기준은 나의 기준 속엔 없다. 글이 쓰여지지 않아 펄펄 끓는 머리로 이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작가만이 나에겐 작가다. 그렇게도 작품이 쓰고 싶거든 이 땅에 돌아와서 써라. 신통치도 않은 작품을 그렇게 쓰고 싶거든 정작 그 곳의 언어로 써라. 자신의 정신위생을 위해서도 또 국위 선양을 위해서도 그것을 택함이 정직함에 속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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