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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31)공산당사건 공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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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7년 9월13일 드디어 오래 끌어오던 공판 날이 왔다. 세칭 조선공산당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경성지법은 지금의 신신 백화점 뒤인 종로구공평동 구 동양고속주차장자리에 있는 목조 건물이었다. 이날을 대비해 법정주변에는 변소를 새로 짓고 건물주위에 목책까지 세웠다.
서대문형무소부근은 새벽부터 서대문서 전 서원이 엄중히 경계를 하고 기마 순사들의 말굽소리가 새벽공기를 깨뜨렸다.
상오6시 무거운 형무소철문이 열리고 간수20명을 태운 자동차2대가 쏜살같이 나갔다. 이어 20분 뒤에는 피고9명과간수3명씩을 태운 경165·경615·경157호 자동차가 잇달아 재판소로 향했다. 3대의 자동차가 피고인들을 태우고 4차례나 왕복해 8시30분엔 보석중인 주종건과 환자인 임형관 백광흠 조리환 등 7명을 빼고 94명의 피고인이 모두 호송되었다.
피고인들은 흰 옥양목이나 모시로 만든 한복을 입었고 간혹 푸른 미결수의를 입기도 했다. 가슴에는 감방번호를 붙인 채 바깥을 볼 수 없게 머리에는 용수가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상오9시40분 간수들은 박헌영 등 피고인들을 재판이 열리는 3호 법정에 모두 들여앉히고 수갑을 끄르고 용수를 벗겼다. 햇수로는 3년이란 긴 세월을 같은 감옥에 있으면서 안부를 모르고 지내던 동지들끼리 묵묵히 목례를 교환하는 순간이었다.
박헌영의 창백한 얼굴에도 오랜만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법정 안에는 육혈포를 찬 간수20명이 일반방청객과 피고인 석 사이를 막아서서 경계했고 방청석전후좌우엔 정 사복 순사가 들어차 있었다. 재판장 석 뒤에는 특별방청석이 마련돼 총독부 법무 국 등 관계관청에서 10여명이 나와 앉아있었다. 이 공판의 변호인단은 일본에서 온 고옥 변호사를 비롯해 허헌 김병노 이인 정구영 권승렬 김태영 김찬영 최진 한국종 한상억 등 당대의 쟁쟁한 변호사가 15명이나 되었다.
특히 고옥 변호사는 일본의 노동농민 당에서 이 사건을 변론키 위해 파견한 동경의 자유법조 단 소속 변호사로 시종일관 열렬한 변호를 하는 것이다.
상오10시 시본 재판장을 선두로 협·중도 양배석 판사와 중야 검사·입회서기 등이 법정에 들어왔고 이어 장미 검사정(검사정)이 열석한 가운데 공판은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먼저『피고가 여러 사람이므로 일일이 나와서 대답할 수 없으니 그 자리에서 말해도 좋습니다』그 경어로 말하면서 피고인들의 대답여하에 따라 심리가 두 달 석 달 걸릴지도 모르니 잘 알아서 대답하라는 엄포를 놓고 인정심문에 들어갔다. 재판장의 질문에 대해 피고들은 여유 있게 매우 엉뚱한 대답을 했다. 박선태는 직업을 묻자 『원래 원산 노동 회 간사였으나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니 무직인 셈이지요』라고 답했다.
연전 학생으로 6·10만세사건으로 징역을 살면서 이 사건에 관련돼 붉은 죄수복을 입고 나온 이병립은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직공이외다마는 그전에는 학생이요』라고 대답했다. 11시5분쯤 재판장의 질문이 끝나자 중야 검사는 공소사실을 설명하고 사실심리를 일반에게 공개하면 치안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될 듯하니 방청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변호사들은 일제히 얼굴이 찌푸려졌다.
잠시 후 이인씨가 일어나 『사건대체가 벌써 드러났을 뿐 아니라 내용이 그리 크지도 않은 것이니 공개를 금지해 일반에게 사건이 큰 것같이 놀라게 하는 것보다 공개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고 이어 김병노도 백광흠 등 환자6명을 보석할 것과 공판공개금지는 부당하다는 말을 했다.
고옥 변호사는 『법정 안의 삼엄한 경계 밑에서 피고인들이 자유로운 공술을 할 수 없으니 재판장은 경계에 대해 고려를 하기바라며 공판은 공개해야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 법정 경계문제는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말썽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일어선 김태영 변호사가 신의주지법에서 예심을 받다가 이송된 박헌영 등에 대한 공소기각의 항변을 제출했다. 김씨는 『조선총독은 원칙상 신의주지법예심판사에게 사건이송을 명령해야 하는데 신의주 지법원장과 검사 정에게만 이송을 명령하고 예심판사에게는 명령한 일이 없으므로 경성지법은 이들을 심리할 권한이 없다』고 항의했다.
재판장은 휴게를 선언하고 장미 검사정, 원 법원장 등이 모여 구수 회의에 들어갔다. 하오 1시 다시 공판이 열렸으나 재판장은 심리를 계속하려고 하고 고옥 변호사 등은 피고인들이 진술할 의무가 없다고 맞서 공만이 중단되는 사태를 빚다가 하오3시 폐정되었다.
변호사 김태영이 박헌영 등의 관할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다. 그의 말대로 사건의 이송이 잘못된 것이라면 피고인들은 이론상 반년동안 불법감금을 당한 셈인 것이다.
김태영은 공소기각이 성립되면 박헌영 등은 일단 석방될 것이고 석방 후에 다시 체포되더라도 변호사로서는 대책을 세울 여유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틀째 공판날인 15일 시본 재판장이 의견으로 들어 최후공판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변호인들도 공판이 속히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단 덮어두고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첫 공판이 있은 다음날인 14일 정오 고옥 이승우 김병노 김태영 김용무 변호사 등은 지법으로 시본 재판장을 찾았다.
마침 재판장은 등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변호사들은 배석판사인 협을 만나 ①유례 없는 경계를 해제할 것 ②방청을 절대로 공개할 것 ③병중의 피고를 보석할 것 ④특별 방청석을 폐지할 것 등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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