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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한인 38만 명, 만주국 수립으로 정체성 혼란
만주국 시기에 세워진 북만주 치치하얼 역사. 치치하얼은 구(舊)동북군 계열이던 마점산이 관동군에 저항했던 거점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만주국 수립 다음 달인 1932년 4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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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읽어버린 36년|임정조직과 활동(하)
임시정부는 내외의 도전에 계속 부대꼈다. 외교노선과 무장항일등 방법론의 차이, 지역간 대립등 파쟁도 끊이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마주쳤던 위기의 하나는 22년 만주·시베리아지역의 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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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경치공작대사건(3)
경치공작대사건은 두개의 측면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민국당수뇌부가 군·폐내에 침투해있는 남노당푸락치와 내통해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암살하고 정권을 강악할 음모를 꾸몄다는 정보를 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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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숙청의 대외관계
김일성의 장기에 걸친 대 숙청 극에 대해서 공산진영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는 없었다. 특히 56년의 세칭 「8월 종파사건」이라는 당내투쟁은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의 스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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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31돌을 맞아 본사 동서 문제 연구소 추적|납북 인사들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올해로 6·25 동란은 설흔 한해를 맞았다. 동란의 비극 속에서 납북 또는 월북한 인사들은 얼마나 생존해 있으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리측이 끈질기게 주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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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내건 허울뿐인 단체들만|국토통일원주최 「북한의 종교실태」 학술대회
북한은 72년이후「북조선불교도연맹」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등의 종교단체 이름을 대외적으로 내놓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듯 허위 선전을 일삼고 있다. 1950년대 중반이후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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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내가아는 박헌영
세칭 조선공산당사건의 두번째 공판은 l927년9월15일에 열렸다. 14일에 억수로 퍼붓던비가 밤11시쯤 멎기시작하자 법원에는 방청권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상오0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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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31)공산당사건 공판
1927년 9월13일 드디어 오래 끌어오던 공판 날이 왔다. 세칭 조선공산당사건의 재판이 열리는 경성지법은 지금의 신신 백화점 뒤인 종로구공평동 구 동양고속주차장자리에 있는 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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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709) 내가 아는 박헌영
박이 「모스크바」에 보내는 밀서적 발신 의주사건 조선공산대과 공산동맹이 결성된지 7개월만인 1925년 10월 10일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우연한 한 사건이 생겨났다. 처음 불온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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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년회
지금까지는 박헌영이 서울을 떠나 상해를 무대로 고마공산당의 조직활동에 가담, 훈련을받그 다시 국내에 잠입할때까지의 경위를 대충 이야기하였다. 그럼 박헌영이 해외에 나가 있는동안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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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세태
해방 22년의 전반이 통일을 위한 시도였다면 그 하반은 「분단」이란 기정 사실 위에서 대내적인 충실로 「승공」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내면적 정치투쟁의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