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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년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금까지는 박헌영이 서울을 떠나 상해를 무대로 고마공산당의 조직활동에 가담, 훈련을받그 다시 국내에 잠입할때까지의 경위를 대충 이야기하였다. 그럼 박헌영이 해외에 나가 있는동안 국내에서는 어떤운동이 일어났는가. 박헌영의 국내활동에대해 얘기하기 앞서 잠시 국내청년운동의 개황을 살펴봐야할 것같다. 왜그러냐면 그 무렵 국내엔 녀무 많은 각종사화단체가 난립되어있었고 청년층의 활동계열도 가지각색이어서 시대상황을 이해하는데 혼동을 주기때문이다.
3·1운동이후 세칭재등 총독부의 문학정치가 펄쳐지는듯하자 한국의 강토안은 은통 민족문학운동이 홍수처럼 물결쳤다. 금세 『세계개조의 신기련이내하도다』한것처럼 각지에 청년단체가 생겨 사회및 문화운동에 신기운을 일으켰다. 19l9년에서 20년까지 9백85개의 탄생을 보인 각종 사회단체는 20년에 2천9백89개, 22녀에는 무려 3천2개의 속출을 기록했다. 가위 우후죽순격으로 하룻밤사이 평균 10개씩의 청년단체가 전국 방방곡곡서 생겨난 샘이었다.
당시 서울 장안에만도 70여개의 청년 남녀의 모임이 있었다. 그무렵 오상근 김명직 장덕수 안곽 장도빈 박일병등은 청년단체의 연합노선을위해 20년6월28일 고운동에서 조선효년회연합회를 결성했다. 뒤이어이회의 잔사인 장덕수는 20년6월28일 서울청년회룰 조직했다. 서울청년회의 조직목적은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운동을 가행하자는데 뜻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가맹단체에서 주도권을 잡자는 목적도 포함돼 있었다.
그때 서울청년회의 주요「맴버」 는 김사국 이영 이득년 장덕수 김명식 김회 오상근 한신교 윤자영등이었고 초대이사장은 이득년이 맡았다. 그런데 서울청년회는 조직벽두부터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한 학덕수 김명근 오상근등 전봉마와 좌겸 사회주의마인 김충단 김한 이영 박일학 남정북 고순흠 임봉순등과 틈이 생켜있었다. 좌파는 어떻게든지청년회를 자기들 수중에 집어넣으려고 집요하게 모의중이었다. 그러던터에 22년1월에 접어들어 애기치않은 충돌의 구실이 생겨났다. 전자작 김윤직이사망하자 장덕수를 중심으로하는 계열에서는 김윤직의 생전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에서도 사회장을 하자고 주장하면서 장덕수가 주필로 있던 동아일보를통해 멩렬한 선전을 했던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서울청년회측에서는 김윤식은 국적이없다고 비난하며 사회장을 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김윤직은 갈 알려진것과같이 구한말때 홍문관·공조·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김홍집 내각때는 외무대신까지 역임했다.
그는 이홍장·원세개와도 각별히 교류한 원로정치인이었으나 한·일합병후 중추원부의장이되어 자작칭호를 받아 큰 흠을 저지른 사람이다.
이같은 김윤식사회장사건을 계기로 서울청년회의 양마는 극도로 대립상태에 놓이게되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장덕수에게 또하나 공격의 자료가 튀어나온 것이다. 세칭 사기공산당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사기공산당사건이란 당시 상해파고려공산당의 영수 이동휘가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공작금 40만원중 극히 일부를 장회수등 조선청년회연합회간부측이 전달한것을 이들이 이 돈을보태 자기네 문화사업목적에만 썰버린데서 발단됐다. 뒤늦게 이를 알아낸 김사국등 좌파청년들은 장덕수측이 그돈을 사취했다그 폭로, 22년4월 재명처분을 들고 나섰다.
초기의 윈로공산주의자 금태수씨에 따르면 장덕수계의 자금독점사건은 사실이라고 한다.이동휘밑에서 재정관계를 도맡고있었던 김씨는 당시 장덕수에게 전달된돈이 약4만8천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니 정치자금이란 항상 말썽의 불씨를 일으키는 모양이다.
그 두사건율 계기로 서울청년회는 4월에 열린 제3회 청년회연합회에서 18개지방단체와 함께 탈퇴해버렸다. 이탈퇴사건은 한국사상계에 처음으로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두갈래길을 갈라놓은 계기가 되는것이다.
서울청년회를 주도한 김사국이란 사람은 1892년11월9일 충남연산에서 상민의 아들로 출생하여 부친을 잃고 면모를 마라 금강산 유호사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서울 보성학교에 입학한 일은 있으나 생활고로 중퇴하고 한·일합방후에「시베리아」만주로 유랑했던 사람으로 인품이 호탕하고 활동적이었으나 나중에 망명중 폐결핵에 걸려 귀국끝에 26년5월8일 비명으로 숨진다.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청년회는 당시 우리나라 청년운동단체로는 가위 대표적인 사회주의 청년단체로 전국에 산하가맹단체까지 가지고있어 대단한세력을 뻗쳤다. 이들은 대부분비유학계이며 외국유학을 재대로 하지못한 국내 출신 파였다. 그런데 같은무렵 청년운동단체가운데는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구성된 북성회(일월회)계의 신진청년단체가 생겨 서로 시기심과 함께 「라이벌」의 입장에 서게됐다.
북성회란 일본 동경에서 야수 변희용 이여성 송덕만등 60여명의 유학생이 당초 사회주의 계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했던것이며 그후 발전적으로 해체, 국내 본부격으로 북풍회로 만든다. 배풍회란 이름은 『북풍이 한번 불면 모든 빈대나 기생충이 날아가 버린다』 는 속언을 따서 붙인 것이다.
북성회계가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청년운동을 벌이자 국내파인 서울청년회사이에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거의 10여년가까이 끈질진 암투를벌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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