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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한인 38만 명, 만주국 수립으로 정체성 혼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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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 30면

만주국 시기에 세워진 북만주 치치하얼 역사. 치치하얼은 구(舊)동북군 계열이던 마점산이 관동군에 저항했던 거점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만주국 수립 다음 달인 1932년 4월 27일 언론인 김경재(金璟載)는 서울역(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향했다. 만주국 수립 이후 간도 현황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주국 수립 이후 자신들의 상황을 국내에 소개해 달라는 간도 한인들의 요청도 있었다. 김경재가 두만강 북쪽 간도에 도착한 것은 나흘 후인 31일이었다. 김경재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를 역임한 민족주의자였지만 이후 사회주의로 전향했다가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2년6개월형을 선고 받고 1929년 8월 출옥한 터였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⑦ 사라진 독립운동 근거지

만주국을 바라보는 김경재의 심사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만주 장악은 큰 충격이었다. 가장 곤란해진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일제가 만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독립운동 근거지가 사라졌다. 독립운동가들은 항일유격대에 가담하거나 중국 대륙으로 퇴각하거나 만주국의 치안숙정 공작에 따라 전향해야 했다. 중국 내륙 퇴각도 쉽지 않았다.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던 아나키스트 정화암은 “감시망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동지들이 한데 뭉쳐서 나올 수도 없었고 걷다가는 쉬고, 기차를 탔다가는 다시 자동차를 타고 하는 고역을 겪으면서 쫓겨야 했다(몸으로 쓴 근세사)”라고 회상했다.

동북행정위원장 장경혜는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겠다고 선언했다.

독립운동가들은 퇴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만주에 사는 한인들은 그저 몸으로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경재는 삼천리 1932년 5월 15일자에 동란(動亂)의 간도(間島)에서라는 기행문을 실었는데 “간도(間島)는 조선인의 간도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이 증명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김경재는 “윤관(尹瓘)이 16만의 대병(大兵)을 이끌고 가서 두만강 이북 700여 리를 개척하는 동시에 선춘령상(先春嶺上)에 석비(石碑)를 세우고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고 새겨서 국경을 명확히 했다고 하는 바 그곳은 지금의 북만주 영안현(寧安縣)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 한국 주류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에 따라 고려의 동북쪽 강역을 함경남도 흥남 지역까지로 축소하고 있지만 김경재처럼 대일 항쟁기 때 지식인들은 북만주 영안현까지를 고려 국경으로 보았다. 고려사지리지는 “(고려의) 동북쪽 강역은 곧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東北則以先春嶺爲界)”라고 말하고 있고, 태종·세종실록에서 이를 거듭 확인하고 있는데, 선춘령은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이다.

1 치치하얼 항일유적지. 마점산이 관동군과 전투했던 곳에 세워진 기념비다. 2 마점산. 마적 출신이지만 항일 영웅으로 떠올랐다.

일본·중국·한국·만주·몽골 五族協和 주창
대한제국은 1903년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면서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키고 간도 백성들에게 세금을 납부 받았다.(망국의 몇 가지 풍경⑪간도 강탈 참조)

그러나 일제가 1909년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는 대신 동청철도 부설권을 넘겨 받는 간도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는 바람에 중국령으로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만주 전역을 장악했으니 간도 한인들의 관심이 비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경재는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에 갈 때는 이것이 외국이구나 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철도 연선(沿線)의 어디를 보나 조선의 집이요 농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김경재는 ‘간도의 조선인은 38만1000여 명이지만 중국인은 11만6000여 명이고 일본인은 2000여 명’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김경재는 그러나 “다만 토지소유지례(土地所有地例)에 있어서 중국인의 소유가 조선인 소유의 배가 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간도 전원의 높다란 담장에 사위(四圍)에는 포대를 축조한 중국인 토호의 집이 있고 그 부근에는 게딱지 같은 동포의 농가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본다”면서 “이런 역사와 현실은 간도는 조선 사람의 간도라고 부르짖게 되었고 또 그것이 그곳 동포의 심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 왕도낙토(王道樂土)’를 내걸었다. 오족(五族)이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만주인, 몽골인을 뜻한다. 관동군 전략가였던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국을 미국과 맞붙게 될 ‘세계최종전쟁’의 기지로 삼았다. 그로서는 만주국이 새로운 이상 국가 건설의 실험장이었다. 군사 침략이란 패도(覇道)를 택했으면서도 왕도(王道)를 내건 자기모순이 만주국의 복잡한 성격을 말해준다.

중국인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던 한인 농민들로서는 일본이 실권을 장악한 만주국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이 무렵 재만 한인들이 조직한 민주단(民主團)이란 단체가 있었다. 민주단 상무이사 전성호(全盛鎬)는 김경재에게 자신들을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지만 용정(龍井)시내에서 대성학교, 동흥학교 같은 민족주의 학교들과 대립되고 있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적지않은 논란을 낳은 단체였다.

그런데 이 민주단 관계자가 중추가 되어 주창한 것이 간도청(間島廳) 설치 운동이었다. 간도청 설치 운동은 ‘1. 간도를 만주국 내의 특별 행정구로 설치해 달라, 2. 간도청의 임직원은 간도에 거주하는 민족의 비례수에 따라 임명해 달라, 3. 간도청의 장관은 일반의 공청에 의해 달라’는 등의 세 가지 요구였다. 이에 대해 김경재 같은 사회주의자도 “간도 자치구 설정에 대한 이론과 시비는 별문제로 하고 간도는 조선인의 간도라는 것이 간도에 거주하는 동포 전체의 의사이자 욕구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식민지 치하의 재만 한인들은 만주국에 지분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었다.

만주를 직접 통치하려던 관동군이 육군 중앙의 방침에 따라 새로운 국가 건설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유력자들의 협조가 필요해졌다. 만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와 양립할 수 없었고 만주사변 이후 거의 궤멸되었다. 이 점이 만주 한인들의 딜레마였다.

마적 두목 마점산, 건국 4거두 회담 참석
1932년 2월 16일 저녁 심양(沈陽)의 대화(大和:야마토)호텔에서 건국회의(建國會議)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4거두 회담이 열렸다. 장경혜(張景惠), 장식의(臧式毅), 희흡(熙洽), 마점산(馬占山) 회담이었다. 그런데 이 네 거두의 배경이 사뭇 달랐다.

만주국 총리대신이 된 후 친가가 두부가게였다고 해서 세칭 ‘두부총리’로 불린 장경혜는 봉천군벌 중진이었다. 1926년 봉천파가 장악한 북경정부에서 중화민국 육군총장을 역임했고 1928년 장작림 폭살 사건 때 함께 중상을 입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장작림의 뒤를 이은 장학량이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합류하자 장경혜도 남경 국민정부의 군사참의원(軍事參議院)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자마자 만주로 돌아가 장작림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할 때의 커넥션을 되살려 흑룡강성 성장(省長)에 취임했다. 장식의도 장학량에 의해 1930년 요녕성(遼寧省) 정부 주석(主席)에 임명되었던 장학량의 측근이었다. 그래서 만주사변 직후 관동군에 의해서 구금되었다. 당초 관동군은 원금개(袁金鎧), 감조새(<95DE>朝璽) 등에게 봉천(奉天)지방자치유지회를 조직하게 했지만 곧 역량 부족이 드러나자 장식의를 석방시켜 1931년 12월 봉천성장(奉天省長)에 임명했다.

희흡(1883~1950)은 청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의 친동생 무르하치(穆爾哈齊:Murhaci)의 후예로서 만주국 종성(宗姓)인 애신각라(愛新覺羅)씨였다. 희흡은 일본의 동경진무학교(東京振武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 후 동북육군강무당(東北陸軍講武堂) 교육장을 맡았던 군사통이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희흡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제국의 부활을 꿈꾸면서 4자회담에 참석했다.

4자회담 참가자 중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은 빈농 출신의 마적 두목 마점산이었다. 그는 1911년 장작림의 측근이었던 오준승(<5449>俊陞)에게 발탁되어 1925년에는 여단장까지 올랐다. 만주사변 발발 직후 장학량에 의해 흑룡강성 주석대리에 임명된 그는 북만주 치치하얼을 기반으로 관동군과 정면 충돌하면서 구동북군(舊東北軍) 계열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31년 12월 관동군의 이타가키(板垣征四<90CE>)가 마점산의 본거지를 압박하면서 사개석(謝介石)을 통해 흑룡강성 성장의 지위를 주겠다고 회유했다. 여기에 하얼빈까지 함락당하자 마점산도 2월 16일 4자회담에 참석한 것이다.

다음날 장경혜는 동북행정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고 2월 18일 국민정부로부터 동북(東北:만주) 지방의 이탈을 선언했고, 3월 1일 만주국을 건국했다. 만주국 수립 직후 마점산은 흑룡강성 성장 겸 만주국 군정부장을 겸임했지만 4월 1일 흑하(黑河)를 몰래 탈출해 라디오로 항일을 호소하면서 동북구국항일연군(東北救<56FD>抗日聯軍)을 조직했다. 그러나 관동군에 패해 1933년에는 소련으로 탈출했다가 유럽을 통해 중국 본토로 다시 귀국했다.

2월 16일의 이른바 건국회의 때 장경혜와 장식의는 입헌공화제를 주창하고 희흡은 제정(帝政)을 주장하는데, 관동군의 조정에 따라 부의를 집정(執政)으로 삼는 만주국이 건국된 것이다. 이처럼 독립운동세력이 와해된 상태에서 재만 한인들은 만주국 건국에 별 변수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붐’은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