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12)제31화 내가 아는 박헌영(30)예심의 올가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박헌영의 공판에 앞서 일제가36년의 통치기간동안 한국사람들의 사상동향에 따라 별별 이름의 법과 제도를 만들어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는 물론 온 국민에 대한 탄압을 어떻게 가중해왔는가를 얘기해 본다.
얼핏 손꼽아 보아도 한일합방직후, 구한말시대의 악법이었던 보안법(광무11년7월 법률 제2호)을 그대로 살려 한동안 활용하더니 이어3·1운동 등 민족주의자들의 반일운동이 고개를 들자「대정8년 제령 제7호」를 공포했고, 이어 1923년 관동대지진이래 반일독립의 항쟁과 공산주의 운동이 본격화되자 25년 5월7일「치안유지 법」이라는 전대미문의 악법을 만들어 본격적인 사장탄압에 나섰던 것이다.
이밖에도 종전말기에 이르러는 「조선임시 보안 령 시행규칙」및「조선 사상범 보호관찰 령」,「사상보호관찰법」등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온갖 법률에다 사법경찰관에 유치명령 권을 부여했고, 자기네 형사소송법의 예심제도를 들여와 기한 없는 불법감금을 자행해왔다.
본시 제령 제7호는 19l9년3·I운동이 일어나자 당황한 일제가 동년4월 소위「정치에 관한 범죄 처별의 건」이라 하여 반일독립운동을 응급처치하기 위해 만든 전문3조의 악법으로『조선총독은 천황의 위임으로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법률을 재정 할 권한을 갖는다』는 조선총독 령에 근거한 것이다.
이 법은 종전의 최고형이 2년 이하이던 보안법을 강화한 것으로, 독립운동가 및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에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화요회계의 김재봉이 21년6월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6월을 선고받게 한 것도 바로 이 법이었다.
이 제령 제7호는 법조문 해석으로 보아 『정치의 변혁을 목적하고 다수 공동하여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고자…』한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던 듯 하다.
그러나 3·1운동후 수년동안 갑자기 고개를 들기 시작한 독립운동 및 공산주의 운동·노동운동 등으로 사회가 시끌시끌해지고, 또 이들이 법망에 걸렸을 때 『경치의 변혁 내지 국체의 벽혁』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다만 현 사회의 경제조직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할 때, 법 이론상 그들에 대한 죄 구성의 헛점이 많았다.
이래서 만들어진 특별법이 치안유지 법-25년5월12일 시행당시는 전문7조였으나 그 뒤 몇 차례 개정을 하며 65조로 늘려 조선의 사상활동은 물론 사회활동까지를 완벽하게 옭아 넣을 수 있는 보도가 되었다.
이 법은 그 해석에 따라 사법관의 기분에 따라 어느 대상이든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 법을 가리켜『바다 밑의 물고기 똥까지 쓸어 가는가는 그물(세망)과 같다』고 비꼬았다.
사실 해방이 되어 이 법이 폐지되기까지 6·10만세사건, 각종 공산당사건 및 광주학생사건 등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의 적용 법은 거의 전부가 치안유지 법이 있던 것이다.
특히 개정된 이 법의 39조에 따른 예방구금조치는 일제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조문이다. 이는 이미 형을 받았거나, 집행이 완료됐거나, 석방됐을지라도『다시 죄를 범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2년마다 구속기간을 바꿔가며 무기한으로 예방 구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재판 절차 없이 『죄를 범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일제 때 치안유지 법 못지 않게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장 골탕먹인 것은「예심」제였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본재판제도의 예심 제가 들어왔을 때는, 증거조사나 증인심문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사건을 차근차근 조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럴싸한 취지를 앞세웠으나 사실은 사상범이나 감정 있는 대상을 장기 구금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
판사의 구속영장제도가 없던 당시 경찰과 검찰이 구속피의자를 조사하는 기간은 각각 열흘씩이었는데 이 짧은 기간으로 모자라니 철저히 수사하여 흑백을 가리고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검찰조사가 끝나면「구 공제」의견을 붙여 공판에 회부하거나「구 예심」의견으로 예심만사에게 넘겼다.
예심판사는 단독판사를 오래 지낸 부장급판사로 지법의 경우 많아야 2명, 보통 1명씩이었고, 지원은 상석판사가 겸무를 했는데 공판과도 떨어져 있고 독립되어 있는 검찰수사의 보강과 공판회부 여부를 결정하는 이중성격을 갖고있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그 숫자가 각 법원에 한 두 명이었기에 사건이 많다보면 수년씩 기다려도 피고인은 자신이 공판에 회부되는지 여부도 알지 못하고 지내는 수가 많았다. 예심에는 구속기간이 정해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상운동이 한참 고개를 들 무렵에는 검사는 증거가 없더라도 무조건 구속했다가 예심에 넘겨 골탕을 먹이곤 했었다.
당시 변호사로 활약하던 이인용의 증언에 따르면 27년쯤 전라도 탄산에 살던 이택수란2O세 가량 된 청년이 아버지 약에 마약을 넣어 먹여 죽였다는 혐의로 구속됐는데, 증거가 없는 데다 계속범행을 부인하자 검사는 예심에 회부해 7년 동안을 살다가 첫 공판을 받은 뒤 무죄로 풀려 나온 일이 있어 당시 예심제도는 한국인을 괴롭히는데 너무도 널리 악용됐다고 한다.
박헌영의 경우도 l925년11월에 검거되어 27년9월 첫 공판을 받기까지 1년10개월 가량을 예심기간에 묶여 구속되었었다.
예심기간 중 판사는 3개월마다 구속기간을 바꾼다는 종이쪽지 1장에 도장만 찍으면 됐었으니 5,6년씩 지나면 구속기간경신서가 2O여장씩 묶음으로 기록 뒤에 붙어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오랜 예심을 하다보면 공소 시효가 지나거나 혐의가 없어 면소 판결을 받거나 공소기각결정을 받게되는데 이럴 경우 검사는 판사가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을 했다하여 즉시 항고, 다시 얼맛 동안을 구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인용에 의하면 이밖에도 사법경찰관의 유치 명령 장이 남용되어 혹 그들의 얼굴이라도 잘못 쳐다볼라치면 이유없이 열흘구류를 살고 계속 눈밖에 나면 만기를 채우고 나오는 자를 다른 경찰서 동료가 경찰서 문밖에서 채어가 또 열흘 또 열흘…이래서 대야 속의 물을 휘저어 돌리 듯 뺑뺑 돌린다고 일어로 「다라이·마와지」란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