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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지원 작전>⑮|의무(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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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6·25전쟁 3년 동안에 각 육군병원으로 후송된 부상자와 그 밖의 환자는 모두 70만 9천 9백 75명이나 됐다. 이는 월 평균 1만 8천 6백여 명 꼴이며 연도별로는 50년을 제외하고 매년 20만 명이 넘는 숫자였다.
6개 기술병과 중 「의무」는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여 이 같은 전장의 「인간재난」을 인술로써 구해냈다.
전쟁 중 대폭 증강된 6개 병과의 총 병력은 53년 7월 현재 6만 6천명이었는데 이중 의무가 1만 3백 52명으로 공병(2만5천명) 다음으로 제일 많았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후방지원에서 의무활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곧 짐작할 수 있다.
6·25부터 그해 말까지 불과 6개월 동안의 육군병원 총 입원자수는 9만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개전 당시의 한국군 총 병력과 거의 맞먹는 숫자다.

<부상병들 수용조차 어려워>
하여튼 6·25 3일 만에 입원한 부상병은 3천 2백여 명에 달했으나 후송 수단의 빈약과 미비한 시설 때문에 제대로 손을 쓰지 못했고 상당수가 생명을 잃고 말았다.
전우의 부축으로 전방 구호소를 거쳐 군 의료시설까지 후송되는데는 10시간 이상이 걸리기 일쑤였고 수도, 제1, 제2, 제3, 제5 등의 육군 병원 수용능력은 8천 5백여 명에 불과했으므로 총상·파편상등 하절기의 외과 중상 병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더욱이 약품과 위생재료의 재고도 바닥이 나버려 때로는 급한 대로 민가의 이불을 찢어 총탄이 뚫고 나간 다리를 동여매기도 하였다.
50년 7월 창설된 야전 의무단은 대구에서부터 5백여 종의 미군 의료 지원 물자를 받아 전군에 보급했으나 품목 대부분이 약품·위생재료 뿐이었고 장비지원은 전무여서 병원시설에는 손을 쓸 수 없었다.
육군 의무당국은 이 같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부산 제 5 육군병원에 수용된 많은 환자들을 분산 수용하기 위해 50년 9월 경주·안동·울산 등지에 제15, 제18, 제23 육군병원을 창설했다.
51년부터는 미군 지원에 의한 월 3백 50t 1천 7백 종의 의료자재를 비롯한 의료기구의 대폭적인 보급으로 4개 육군병원이 증설되고 독립호, 자유호, 해방호 등 전용 병원열차가 생기는 등 군 의무 활동은 후송과 수용이 상반하는 가운데 본궤도에 올랐다.
그러면 전쟁 전반의 군 의무 활동을 당시의 육군 의무감과 병원장으로부터 들어보겠다.
▲윤치왕씨(당시 육본 의무감·준장=예비역 육군소장·현 부평서 윤 산부인과개업·78) <나는 「세브란스」 서울대의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49년 4월 중령으로 임관, 그해 9월 제2대 의무감이 됐습니다.
당시에는 일부 국군 고급장교들이 질환이 생겨도 의술과 시설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군 병원을 외면하고 민간병원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리고 국방부 예산 중에는 환자비라는 게 있어 이 같은 군 장교들의 치료비를 공식적으로 보조 해주는 실정이었어요.
한마디로 다른 병과도 마찬가지지만 6·25당시의 군 의무는 시설·의술 등 모두가 엉망이었다고 볼 수 있지요.
육군병원이라야 겨우 1 백 내지 2백 개의 「베드」를 가진 수도(부평) , 제1 (서울), 제2 (대전) , 제3 (광주), 제5 (부산) 병원 등이 있는 정도 였으니깐요.
나는 전쟁 전부터 군의관의 확보를 위한 대책으로 국내의 저명한 의사들을 모두 간단한 군사훈련을 받게 해서 예비역으로 편입시킨 후 유사시 징집하려고 제1차로 백인제·박병래·김동익·임명재 박사 등 유명한 의사 50여명을 부평 군의학교에 입교시켰습니다. 수료 후에는 백, 천씨 등에게는 소령계급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대위, 중위를 줬어요.
이 같은 의사들에 대한 예비군사훈련을 전국적으로 실시할 생각이었으나 육본 참모회의에서 이들에게 배급을 높게 주는 게 말썽이 돼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50년 초 사단 의무대대를 창설할 때도 육본 작전국은 병력 「실링」문제를 들어 중대로 하라는 것을 우겨대서 편제만은 대대로 해놓았다가 전쟁이 나면 병력을 채워 쓰자고 주장, 결국 내 의견대로 됐었는데 6·25전쟁 동안 이 의무대대는 아주 큰 역할을 했어요. 전쟁이 발발하자 매일같이 후송돼오는 부상병들을 기존 의료시설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어 병원 확장을 서둘러 제15, 제18, 제23, 제7 육군병원 등을 창설했는데 제23은 대구의과대학 시설을 그대로 울산에 옮겨 만들었던 거예요.
제15 육군병원은 북진 때에는 함흥까지 올라갔었지요. 제27 육군병원은 북진 때 평양에서 창설했다가 1·4 후퇴를 당해 입원환자까지 모두 데리고 진남포로 나와 부산으로 후퇴 했구요. 제27병원 후퇴 때에는 평양시내 청년들을 동원, 환자를 모두 업혀서 대동강을 건냈는 데 정말 애로가 많았습니다.

<51년부터 환자 후송에 만전>
그리고 1·4 후퇴를 하면서 서울대학 부속병원 기구와 시설을 모두 부산까지 열차로 싣고 내려가 제36 육군병원을 창설했는데 이것이 후에 이름을 바꾸어 수도 육군병원이 됐어요.
군의관 확보는 부산·대구에 피난 내려와 있던 서울·연세·대구·광주의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거의 다 자원해서 입대하고 민간병원 의사들도 다수 들어오는 바람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어요. 따라서 군 의료진의 의술이 비약적으로 향상돼 군 병원을 외면하던 일부 고급장교들은 물론 일반 민간인까지도 육군병원을 이용하려는 현상이 벌어졌어요.
전쟁으로 국내 4개 의대가 거의 폐교상태에 이르자 나는 우선 본과 4년 생들을 군의 소위로 임관시켜 각 육군병원에서 근무케 했습니다. 이들 학생 군의관들은 특별히 제1, 제5 등의 4개 병원에 배치, 선발된 임상 교수들로부터 6개월간씩 실습 교육을 받은 후 정식 임관시켰어요.
그리고 본과 2, 3년 생들은 영어실력이 있으니까 통역장교나 위생병으로 많이 들어가 활약 했구요.
그후 4개 의대 학장들한테 이들 학생들은 군 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마쳤으니 그대로 졸업장을 주자고 제의했더니 처음엔 반대를 하면서 제대를 시켜주면 학교서 실습을 받게 해서 졸업을 시킨 후 군으로 보내준다는 거예요. 실습 시설은 물론 교실조차 없는 이 전시 하에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고 설득을 했더니 결국은 내 제의에 따르더군요.
또 위생병으로 근무하는 2, 3학년의 4개 의대생 5백여 명은 군수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의관 양성을 위해 낮엔 병원에 근무하고 밤에는 군복을 입은 채로 학교에 나가 공부를 계속케 해줬어요.
이 같은 방법으로 군의관을 확보하는 한편 미군지원으로 시설을 확장하여 우리 한국군의 의료시설은 전쟁 1년만에 12개 육군병원과 6개 이동외과, 3개 야전 의무대 등으로 크게 발전했어요.
51년 후반부터는 주로 「앰뷸런스」와 트럭에 의존하던 부상병의 후송을 병원열차와 LST등으로 보다 신속하고 안전하게 수송했습니다. 이때까지는 열차후송이라는 게 곳간 차에 거적을 깔아 환자를 싣고 도중 역에서 밥을 지어 먹이며 후송하는 정도였는데 전방에서 대구나 부산까지는 4, 5일간씩 걸렸어요.
하루는 내 수석 고문관한테 미군 수송기관에 의뢰해 못쓰는 객차들을 좀 얻어다가 환자후송에 쓰자고 했더니 쾌히 응합디다.
그래서 파손된 객차 8량을 얻어 들것을 놓아 첫 국군전용 병원열차를 만들고 다음에 또 미군 RTO에서 얻은 것으로 제2 병원열차를 꾸며 각각 자유호·독립호로 명명하고 다시 해방호를 하나 더 만들어 운행했어요. 병원열차는 서부·중동부 전선의 부상병 후송에 사용됐고 동해안온 주로 LST를 많이 썼는데 부상 고급 지휘관은 비행기로 후송하기도 했어요.>

<「핀세트」없어 젓가락을 대용>
▲신학진씨(당시 제 7 육군병원장·중령=예비역 소장·현 오양건설 회장·61)<나는 개전 후 부산 제5 육군병원장, 1 군단 의무참모 등으로 근무하다가 50년 8월 16일 밀양 제7병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낙동강 공방전이 치열할 무렵 전선에서는 때로 연대 의무대가 사단 의무대보다 더 후방으로 나와 있어 말채로 때려 원위치로 나가게 하기도 했어요.
제7병원은 창설을 막 끝내니까 후송환자들이 쇄도, 한때는 1만 명 이상을 수용하기까지 했습니다.
전쟁 중에는 김성진·김석환·최성장·김응윤 박사 등과 같은 저명한 민간 의사와 교수들이 대거 군에 들어와 군의활동에 큰 공헌을 했는데 이분들 때문에 보잘 것 없던 군의 의술도 단 기간 안에 크게 발전을 했던 거예요. 뿐만 아니라 지방 개업의들도 의사회를 통해 전부 소집했어요.
이들 모두가 평범한 군의관으로 군복을 입고 철야근무를 하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각 학교 건물 등을 징발, 병동을 만들어 환자들을 임시 수용함으로써 개전 초기의 군 의무활동은 그런대로 수행돼 나갔읍니다.
북진 전까지의 혼란기에는 지휘나 계통을 따지기에 앞서 각 병동장들의 책임 하에 환자들을 치료, 수용하는 실정이었는데 때로는 「핀세트」가 없어 젓가락을 끓는 물에 소독해 사용했어요.
이 같은 위생재료와 약품부족으로 전쟁초기에는 많은 부상병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51년부터는 각 군단에 1개 이동외과병원이 따르고 「앰뷸런스」중대가 배속되는 등 의무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시작했고 약품과 재료도 미군 지원에 의해 풍부해졌어요.
특히 50년 말부터는 한동안 만병통치로 인기가 높던 「페니실린」이 많이 들어와 각 육군병원과 일선 의무대에서 크게 활용했구요. 그리고 간호장교들의 부족은 여학생들을 간호보조원으로 임시 모집해 충당했는데 모두 열심히 근무합디다.>
◆주요일지 (1952년 11월 28∼30일)
※28일 ▲49대의 B·29, 신의주를 야간폭격 ▲이대통령, 수도사단 시찰 표창 ▲박헌영,「유엔」정위에 제출된 소련의 평화안지지
※29일 ▲「네루」수상, 주은래에게 한국평화안 수락권고 ▲「유엔」 미·영 원조로 대제철공장 준공
※30일 ▲미 공군, 하루에 9백 30회 출격 ▲공산 측, 미 공군이 포로수용소 폭격했다고 항의 ▲영등포의 이 적십자병원 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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