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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지원작전⑫|병참(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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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50년10월 북진 때의 병참 보급지원은 다른 후방지원의 기술병과들과 마찬가지로그동안 닦아온 유무형의 지원전력을 발휘, 전투부대의 진성작전을 기동성 있게 지원해줬다.
또 아군이 평택·제천의 신「리지웨이·라인」까기 내리밀린 1·4후퇴에서는6·25초 와는 달리 중간 보급소나 각 지구창에 보유했던 제반 병참물자들을 직접적인 전투망실 외에는 하나도 유기 또는 방치하는 일이 없이 전량 후송하는데 성공했다.
1·4후퇴는 6·25초와는 달리「질서정연」한 군·민 철수작전이었는데 군 병참당국은 전에 미처 못 가지고 내려갔던 시설물들까지 모두 후송시켰다.

<부산·대구에 영현 보관소 설치>
한편 51년부터는 보급군기가 확립되고 행정절차의 간소화를 이룩함으로써 군수지원의 기능별 추진보급이 본궤도에 올랐고 병참도 세탁·급유 중대가 창설되는 등 「기능」과 「지역」개념에 따른 야전기능보급체제가 확인됐다.
특히 52년부터 본격화한 병참의 영현업무 처리는 전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정확과 존엄성을 높여 국민의 대 정부 신뢰감과 장병의 사기앙양에 크게 기여했다.
병참감실 영현과는 꼭 필요한 이 같은 단복의 업무를 주관, 전사자들의 유해를 각 부대별로 인근 사찰에 적당히 봉안하던 전쟁 초기의 미봉적 처리를 미식으로 체계화하고 영현을 수집, 부산 범어사·대구 달성공원의 중앙 영현 보관소 등에 보관하며 매년 10월에는 합동 추도식을 올렸다. 그리고 전쟁3년 동안 7만7천7백54명의 전사자중 7만732위의 영현을 수집, 일부는 유가족에게 봉송했고 나머지는 57년4월20일 국립묘지에 안장할 때까지 안치소에 봉안해왔다.
또 휴전 조인 후 판문점에서 적 시체 1만3천5백28구를 공산측에 인도해 주고 아군유해 4천1백1구를 인수해 오기도 했다.
다음은 영현업무 처리와 일선사단 병참지원에 활약했던 장교들의 이야기.
▲이인변씨(당시 병참감실 영현 과장·소령=예비역육군대령·현 한 일 합섬주식회사이사·45) <51년까지는 육본에 영현계가 있고 병참 단에 묘지등록 중대가 있어 전사자들의 영현업무를 처리했는데 체제를 강화해서 적극적인 업무수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52년3월 내가 영현과장으로 들어간 이후부터였습니다.
편제는 각 사단 병참중대 영현 등록 소대를 두고 연대 급에는 등록 반을 배치해 전사 발생과 동시에 유해를 수집, 야전 화장을 한 후 부산 범어사 봉안소로 집결시켰어요.
전황이 긴박해 갑작스런 후퇴를 할 때는 임시매장을 해놓았다가 다시 진격하면 파내서 화장 처리를 했구요.
전투가 심할 때는 전선의 하루 전사자가1천여 명씩이나 됐는데 일선 영현 중대들은 이를 모두 수집, 처리하느라고 눈 코 뜰 사이가 없었지요.
나는 체제 정비 때 행정명령을 통해 특히 전사자의 기록과 유품 수집에 대한 「정확」을 강조했어요.
전쟁초기 일부 부대에서는 전공문제로 실종자를 전사자로 보고했다가 포로 교환 때「사자」가 동아와 보니 전사통보를 받았던 부인이 개가한 예가 더러 있어요.
전사자의 기록을 소홀히 해서 일어난 가정비극이었지요.52년 하반부터 영현 처리는 일선 영현반(화장)→서울·춘천의 전방 봉안소→부산 범어사 중앙보관소로 질서 정연하게 수송, 보관됐고 기록도 연대장파 군의관이 육하원칙에 의한 확인보고로 정확을 기했습니다.
그리고 중앙 및 전방 봉안소에는 병참감실 직할 영현부대가 각각 1개 중대씩 배치돼 있었고 일선 사단의 영현소대 업무가 벅찰 때는 이 3개중대가 직접 나가 지원을 해줬어요.
53년 초 범어사에는 3만1천57위의 영현이 봉안돼있었는데 장소가 비좁고 양산 일대에 출몰하는 공비들이 총질을 해대는 등 존엄성과 유족들에 대한 체면이 안서 대구달성공원의 박물관으로 이동, 안치시켰습니다. 범어사에서는 쥐들이 영현 상자를 긁어먹는 바람에 찾아온 유족들이 제발 자기 남편이나 아들 것을 위로 올려놔 달라고 간청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당시 상공 장려관으로 사용 중이던 달성공원의 박물관을 징발하는데도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신현돈 경북지사를 병참감과 같이 찾아가 몇 번 사정을 해도 잘 안돼 결국 백선화 참모총장 한데 이야기해서 징발했고 안치소 설치작업에는 공병감실의 지원을 받아 해은·진열장 등을 깨끗하고 존엄성 있게 꾸몄어요.
또 현 영사관 자리에 위치했던 서부전방 봉안소와 춘천의 봉안소도 대구 중앙 영현 보관소처럼 꾸미고 모든 기록「카드 」를 개가 열람식으로 정리배치 했구요.
나는 52년부터 미8군 관계자들과 합동으로 휴전회담에 따른 유해교환에 대비, 북한지역의 아군유해 매장지를 좌표로 표시한 5만 분의1지도와 적 시체 매장 기록 등을 가지고 비밀회의를 자주 열어 대책을 세워 나갔습니다.
처음엔 서로 쌍방지역에 들어가 지도상의 좌표를 찾아 시체들을 파내 오기로 합의됐었으나 군사보안등의 문제로 공산측이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결여되고 54년9월에야 판문점에서 집단으로 인수·인계 해버렸어요.
우리는 53년 휴전 직후 전국에 산재한 적 시체들을 발굴 해다가 강원도 오음리에 집결시켜 적군묘지를 만들어 놨었어요.
판문점 유해교환 실무회담의 아군측대표는 정재봉 대령(현 연합실업사장) 이 나가 수고했었읍니다.

<화차·lst로 중부전선지원>
▲방관득 씨(당시 부산 기지보급창장·중령=예비역대령·현 해군공사이사·54) <나는 50년8월 피복창장 자리를 김기임 중령과 교대하고 기지보급창장으로 부임, 창을 창설했습니다.
고 다시 이 자리를 미군에게 주고 우암으로 옮겼어요.
우리 기지창은 처음엔 세관자리를 징발해 사용하다가 현 범일동 ○○기지창자리로 이동했 아군 총 반격전이 시작되면서 우리 기지창은 미군 항만사의 수송지원을 받아 매일 중동부전선에는 화차 30양씩의 병참물자를, 동부전에는 LST2척씩의 물자를 수송 보급해 줬어요.
9·28수복 전 후에는 육본 병참감실과 통신이 잘 안돼 내가 단독 판단으로 전선병력을 대충 계산해 그대로 보급품을 보내줬습니다.
10월 다시 김기임 중령과 자리를 바꾸어 서울로 올라와서 피복창을 재건했어요.
이기노 서울시장한테 요청해서 시가 보유한 재봉틀을 얻고 적이 가져가다 버린 것들을 회수해서 현 대광중·고 자리의 전 피복창에서 작업복 등을 만들었어요.
1·4후퇴 때에는 창의 군속 백 여명과 시설일체를 화차28대에 싣고 부산으로 내려가 김지씨 한테 부탁 광안리에 대지를 얻어 천막을 치고 제7피복창의 전신인 제1079부대를 창설해서14일만에 재봉틀 4백대를 가동시켰습니다
▲최창화씨(당시 제2사단병참부장·대위= 예비역대령·현 충무남창산업대표·48) <나는 서울에 올라와 병참학교에서 고등 군사반 교육을 받던 중 6·25를 당했습니다. 마침 주말이라 대전으로 내려와 있다가 25일 밤 사단과 함께 의정부로 올라왔어요.
50년8월에는 7사단병참부장으로 가서 북진 때는 평양까지 들어 갔구요. 우리 병참부대는 순천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때부터 서야 전방에 보급다운 보급이 되더군요. 그 동안의 전방보급은 휘발유와 식량 등이 조금씩 올라올 정도고 대부분이 현지 조달이었어요.
순천에서는 식량·휘발유는 물론 피복·장구 등 병참4종목의 보급품들을 완전히 받았어요. 옷도 이때까지는 노획한 적군의 방한복들을 많이 입고있었는데 국산방한복이 지급되더군요.
미군지원의 내복과 양말 등은 너무 커서 그냥 입긴 했지만 아주 불편했어요.
이 무렵 약 한달 동안 국산 비빔밥통조림이 보급됐었는데 일선에 도착하면 이미 깡통에 녹이 나고 변질돼 버리고 말았어요.

<일선지휘관 병참역할을 경시>
고지전이 치열했던 52∼53년의 국군급식은 주로 주먹밥이었는데 겨울철에는 돌멩이처럼 얼어붙기가 일쑤였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어요. 한때는 미싯가루와 일제「레이션」이 보급됐었으나 곧 중단되고 말데요.
일선 병참부대는 전사자의 화장처리 때문에 애를 먹을 때가 많았어요.
유해를 사단병참부대까지 운반해오면 신원을 파악한 후 화장해서 후방 봉안소로 후송했지만 전황이 급하면 그대로 현지매장하고 말았어요.
그리고 일선 지휘관들은 병참역할에 대해 별로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보급이 조금만 늦으면 불호령을 내려 고충이 많았어요.
하옇든 나는 「죽일 놈」소리를 수없이 들었으니깐요.
52년 병참감실에 근무할 때인데 한번은 수석고문관이 감실로 들어오더니 한국군이 휘발유를 빼내 팔아먹는다고 아우성을 칩디다. 이 같은 항의를 받고 난 병참감은 『한국군용 휘발유와 미 군용휘발유의 색깔을 다르게 하자』고 하니까 고문관의 말문이 막혀 버리더군요. 사실 휘발유는 국군보다도 미군들이 더 많이 유출시키는 실정이었거든요.
▲이대희씨(당시 서울 보급소 창고 장·중위=예비역중령·현 대한종합식품대전공장서무과장·48) <나는 북진 때는 아동보급소 단양파견대장을 했는데 당시 우리파견대는 4개사단 보급분의 물자를 가지고 있었읍니다. 9·28수복과 더불어 이 물자들을 현 서소문 수산시장 자리에 싣고 올라와 서울보급소(소장 김상민 소령)를 설치했어요.< p>

<8사단 처음으로 머플러 둘러>
서울 보급소는 평양 군 우리까지 전방 추진보급을 해줬습니다. 수송은 주로 「트럭」을 사용했는데 평양까지 갖다 오는데는 3일이 걸렸어요.
후방지원 병참장교로는 내가 제일 먼저 평양엘 들어갔었습니다.
북진 중 서울을 거쳐가던 8사단은 화신포목상회에서 천들을 꺼내서 사단표시「머플러」들을 만들어 둘렀는데 이게 육군 「머풀러」의 효시였지요.
우리는 4번째로 평양보급을 추진하다가 금화 위에서 적 패장병한테 보급차량의 습격을 당해 큰일날 뻔했어요.
마침「트럭」에 단 기관포가 고장나 대전도 못하고 금화로 후퇴, 치안대에서 수류탄 등을 얻어 가지고 올라갔더니 적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디다.

<주요일지(1952년11월16일∼19일)>
※16일▲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한국전의 의의 강조하는 성명발표 ▲미 원자력 위, 「에니웨토크」도에서 수폭실험 성공발표
※17일▲ 「인도차이나」전격화, 불공군 호군 집결지 24시간폭격
※18일▲진 내무장관, 정부 환도설 부인
※19일▲18일 현재 한국전에서의 미군 총 인명피해는 12만6천7백 명이라고 발표

<알림>4권의 책으로 발간된『민족의 증언』을 보시면서 느낀 의문이나 미심한 점, 그리고 비판이나 요망사항이 있으신 분은 서슴지 마시고 서면이나 전화로 알려 주시면 즉시 해답을 드리는 동시에 앞으로의 연재와 출판계획에도 반영 또는 참고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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