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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받는 「일본문화 일원화」|「동아시아 고대문화를 생각하는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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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박동순특파원】지금 일본의 이른바 「통설적 고대사관」은 심각한 근원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동아시아의 고대문화를 생각하는 모임」은 지난10일「일본의의 기원」「심포지엄」(12일자본지4면)을 가진데 이어17일에 다시 「동아시아」에서 본 일본고대문화」란 「심포지엄」을 마련, 종래의 통설적 「황국사관」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새로운 각도에서 고대사관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여기에는 특히 한·일 양측이 함께 참가하여 이 고대사 논의는 새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뚜렷이 해주었다.
한국 측 참가자(이진희·김 달 수) 등은 일본의 기성사학자들이 지니고있는 한·일고대관계사 연구에 있어서의 편견과 방법론상의 모순을 비판하는 한편 「황국사관」의 테두리 안에서 「터부」시 해오던 「만세 일손의 천황 가」에 대해서까지 그 성립경위 대해서도 과감히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아직껏 짐짓 쟁점을 흐리려는 일본사학자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더욱 주목된 것은 이날의 일본측 참가자들이다. 강상파부·상전정조·상원화·대림태량 교수들은 한국 측 주장에 동조. 『편견과 방법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상전정조·경도 대)고 밝히고 「율전사학」을 비롯한 기성사학자들의 사관을 전면적으로 공격(강상파부·동 대·상지대)하는 한편 한·일고대사의 주요한 쟁점이었던 광개토왕 비문조작과「임나일본부」의 허구성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야마또」(대화) 조연 및 위국 의 실체(상전정조)와 그 지배자들의 유래(대림태양) 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 금후 새로운 연구가 불가피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강조하여 일본고대사 재편성이 현실적 과제임을 명확히 했다.
이날 「연구사의 측면에서 본 일본고대문화」를 발표한 이진희씨는 명치연간에 있었던 「일본 선주민 논쟁」에 이미 왜곡된 저의와 사고방식이 잠재한다고 지적했다.
즉 『야만·무례한 조선을 징벌』한다는 정한론을 통하여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당시의 팽창 정책을 뒷받침했는데 그 황국사관의 경향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런 「일본문화일원론」으로 인해 일본의 사학자들은 고대구주인의 골격이 파문토기시대의 인골 보다 크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도작 문화가 한반도에서 「세트」로 전파했음에 단순히 「쌀의 전파」라고만 표현하며 일본문화형성 과정에서 이민족의 영향이 컸음에도 임나는 귀화인의 경우에만 이를 인정해온 것이다.
동시에 광개토왕비문의 조작이나 백제의 칠지도 하사 등 명백한 사실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의 문헌을 조작 내지 무시하면서 전개된 이 같은 「야마또」중심, 「기기」중심의 역사적 발상은 시정돼야 한다는 것이 이씨의 지론이다.
김달수씨는 「왕인 과 귀적」을 예 들어 숱한 「역사의 조작」을 지적했다. 일본에 한자문화를 전한 백제 왕인 박사가 도리어「와니」→「왕님」→「왕임」으로 풀어보면「엄청난 존재」였으리라는 대담한 가설을 제기, ①「왕인」의 본거지이던 「하내」의「고시」(포류=후루찌)는 서울·도성이란 뜻이며②「왕인」을 모셨다는 백마신사는 원래는 전방후원분(천황릉의 형태) 이었고 ③고시에는 응신천황릉 비롯해 고분군이 산재하고 일본 사상상 최대규모였음을 짐작케 하는 사임사지가 유존하는 점으로 미루어「왕인」의 실체를 재인식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 1천수백년전의 「야마또」지역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로 차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받아 상전정조 교수는 「위국에서 일본국으로」에서 「야마또」「아야히도」(한인=한국도래인) 의 본거지인「히노꾸마」에 고송총이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일이라고 전제하고「이·김씨의 문제제기에 진지하게 임해야」하며 동시에 고송총 하나도 해명치 못하는 지금까지의 연구태도가 올바른가를 반성해야한다고 말했다.
상전교수는 도한 스승인 율전좌우길씨의 「율전사관」이 그야말로 그릇됐다는 점을 지적, 중국문헌에 의하면 위왕이 「장군」이었을 때 고구려왕은 「대장군」이었다는 점으로 보더라도 위국이 삼한보다 뒤떨어지는 처지였음이 입증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본서기가 백제의전승을 중시했던 것은 당시의 실력자에 한국인이 많았던 때문이며 「임나일본부」도 실력자가 「가라하라」(한복), 즉 한국인임이·서기에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한·일고대관계사는 전면 재검토 돼야한다고 주장한 상전교수는 변한(임나) 및 구주지역의 「책자」가 연합해서 일본왕조가 성립된 것이며 따라서 위국이 일본국으로 바뀌어 간것도 이러한 새 왕조의 성립이 계기가 됐으리라고 추정했다.
이에 대해서는 대림교수가「민족 앞에서 본 일본」을 통해 ①「야마또」의 관명·지명·언어로 미루어 상층부가「알타이」계 어족이며 ②「고사기」의 건국설화가 백제의 그것과 유사하며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온조가 백제를 세우고 비류가 남해안에서 자살했다는 설화의 의미도 잘 음미한다면『일본의 지배권의 유래를 밝히는 주요한 열쇠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상원화 교수는 고송총 벽화 고분의 인물고법, 산개 등의 무늬, 옷감의 짜임새, 금속 장식구 등으로 미루어 이 고분은 7세기중엽 한국계임이 분명한데 이는 백마강 패전 후 「야마또」국가가 전적으로 해체되기 이전단계에 축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고대문화를 생각하는 모임」은 앞으로 계체 천황릉이라고 추정되는 금성총(대판) 발굴과 광개토왕비 현지조사를 추진하는 한편 계속해서 정상광현 교수 등 황국사관의 원로급사학자들까지도 초청, 고대사 논평을 철두철미하게 이끌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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