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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의 위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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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계의 화폐에는 대개 인물의 얼굴들이 등장한다. 「백원」지폐에 세종대왕의 얼굴이 도안되어 있는 것처럼. 어느 날 미국의 달러, 영국의 파운드, 프랑스의 프랑, 일본의 엥, 서독의 마르크 화폐에 도안된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5달러 지폐의 주인공인 에이브러햄·링컨이 말한다. 『누구도 나를 더 이상 옆으로 밀어내지는 못 할거요. 망할 놈들 같으니라 구.…』그 마지막 말「Gooddmmit」라는 표현은 점잖지 못하다. 링컨까지도 단단히 화가나 있다.
5파운드 짜리 영국 지폐의 주인공은 숙녀. 창과 방패를 들고 있다. 『저는 누구의 얼굴도 감히 오래도록 바라볼 수가 없어요.』방패를 든 여성답지 않게 수줍고 기운이 없다.
이번엔 몰리에르가 말한다. 프랑스 지폐 10프랑 짜리 엔 17세기의 희극작가 몰리에르가 그려져 있다.『나는 어디에서나 누구하고도 만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으로 믿고 있소.』 프랑스 화폐는 그러니까 논외로 친다.
자, 일본 엥화가 발언할 차례다. 백발노인 이다가끼 옹은 거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가오」(안=얼굴)을 잃지 않겠소. 나는 가오를 잃지 않겠소. 나는 가 오를 잃지 않겠단 말이오.』똑같은 주장을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기세가 놀랍다.
독일 화폐는 백 마르크 짜리 거물이 등장했다.『나는 아무 일 없소. 그 길을 그대로 가려고 하오』-.
이른바 달러 위기 제1파가 밀려오기 시작하던 71년 9월 첫 주 호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표지에 그려진 만화이다. 자본주의 5강국 화폐의 영광과 비애가 그대로 묘사되어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렇지만 실상 달러의 기축 통화권에 들어 있는 나라는 함부로 미소를 보일 수도 없다.
아무튼 그 미소인지, 고소인지가 사라지기도 전인 그 해 12월 미국은 달러의 평가절하를 단행했었다. 그 후 14개월 만인 지금 미국은 또다시 평가절하를 발표했다.『더 이상 나를 밀어내지 말라』던 링컨의 얼굴이 무색하게 되었다.
달러는 말하자면 세계 화폐의 척도처럼 되어있다. 따라서 그 척도의 기준이 바뀌면 다른 나라의 척도에도 변동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 척도의 무게가 줄어들면 그만큼 화폐의 가치도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그처럼 달러의 중량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정치 과잉」이 빚어낸 부작용 때문이다.「정치과잉」이란 월남전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세계의 어느 대 전쟁보다도 비싼 전쟁을 거의 10년이나 감당해온 미국으로는 필연적인 고통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달러의 추락은 당연히 미국의 위신과 신뢰의 추락을 의미한다. 닉슨은 언젠가『Let us start』(자 떠나자) 라고 절규한 적이 있었다. 미국이 정말 지켜야 할 것은 그 국가의 위신과 신뢰이다. 달러의 평가절하는『자 출발하자』는 미국의 허탈한 심경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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