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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왕 비장의 무기는 '핑퐁 부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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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2일 서울 암사동에 있는 오핑탁구장에서 김태훈 대표가 라켓으로 탁구공을 튕겨 보이고 있다. 뒤쪽 벽면에는 김 대표와 회원들이 각종 아마추어 탁구대회에서 받은 상장 50여 개가 걸려 있다. [안성식 기자]

20대 청년과 40대 주부가 즉석에서 한 팀이 됐다. 한쪽 테이블에서 랠리를 주고받던 30대 남성과 50대 남성은 또 다른 팀이 됐다. 두 팀은 서로 승리를 장담하며 복식 경기를 시작했다. 스매싱한 공이 탁구대 구석에 꽂힐 때마다 네 사람 입에서는 땀방울만큼이나 굵은 환호와 탄식이 교차했다.

 12일 서울 강동구 암사동 ‘오핑탁구장’. 즉석에서 팀을 짜고 경기를 주선한 사람은 이 탁구장 김태훈(46) 대표다. 김 대표는 평범한 아파트단지 인근 상가건물 지하에서 탁구대 10개를 놓고 월 1500만원의 매출을 올린다. 현재 회원은 110여 명. 이들은 주당 레슨 횟수에 따라 월 10만~15만원을 회비로 낸다. ‘한물 간 비즈니스’라는 탁구장 사업에서 김 대표가 성공한 비결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경영 노하우는 ‘부킹 전문가 되기’다. 탁구장에서는 월 회원이 되면 언제 어느 때나 무제한으로 탁구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보들은 코치로부터 20여 분간 레슨을 받고 나면 함께 쳐줄 상대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하면 다음 달 등록을 포기하기 일쑤다. 김 대표는 이런 초보들의 걱정을 덜어 준다. “일부러 큰 소리로 회원 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는 인사시키고 시합을 주선해 줍니다. 인사하면 아는 사이가 되고, 경기하고 나면 구면이 되지요. 이렇게 하면 초보도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의 일원이 됩니다.”

 두 번째 노하우는 ‘평등한 커뮤니티 만들기’다. 그는 회원들을 탁구 실력에 따라 12부로 나누고 이 명단을 벽에 걸어뒀다. 회원들은 시합을 할 때 이 표에 따라 한 단계 차이 날 때마다 2점씩 핸디캡을 조정한다. 초보인 12부가 10부 선수와 경기를 할 땐 4점을 받고 시작하는 식이다. 핸디캡은 최대 7점까지 잡아준다. 김 대표는 “골프장에서 골프 잘 치는 사람 발언권이 큰 것처럼 탁구장에서도 탁구 잘 치는 사람이 중심이 되지만, 부를 적용하면 실력과 상관없이 평등하게 운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회원들은 매주 토요일 벌어지는 토요 탁구대회에서 세 차례 입상하면 한 부 ‘진급’할 수 있다. 물론 이 대회도 ‘한 부당 2점’ 룰을 적용해 게임을 진행한다.

탁구 실력에 따라 회원들을 1~12부로 나눈 ‘오핑 부수표’(맨 위 사진). 김 대표가 운영 중인 오케이 핑퐁 홈페이지 화면. 이 사이트는 탁구계의 포털로 불릴 정도로 탁구 관련 각종 정보가 모여 있다.

 김 대표가 강조하는 평등 정신은 탁구대 배치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2011년 1월 오핑 탁구장을 열 때 테이블 12개를 들였다. 탁구대가 많을수록 수입이 높아지기 때문에 최대한 배치했다. 그러다 보니 한쪽 기둥 너머엔 탁구대 4개가 다른 테이블과 달리 가로방향으로 오밀조밀 배치됐다. 그러자 널찍한 공간에서는 고수들이, 좁은 곳에서는 초보들이 경기하는 양상이 생겼다. 김 대표는 곧바로 탁구대 2개를 없애고 10개 모두 동일한 방향, 동일한 여유공간을 갖도록 재배치했다. 그는 “회원 모두가 동등한 대우를 받지 않으면 커뮤니티 결속력이 떨어진다”며 “탁구장 주인이 끊임없이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마지막 노하우는 ‘회원을 탁구장의 주인으로 만들기’다. 오핑탁구장 영업시간은 오전 10시~ 오후 11시지만 김 대표는 퇴근할 때 열쇠를 경비실에 맡긴다. 회원들 중 언제든 탁구를 치고 싶은 이는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심지어 금고 문도 열어둔다. 회원들끼리 운동하는 시간에 일반 손님이 들어오면 회원들이 시간당 1만원의 사용료를 받아 금고에 넣고 장부에 적어둔다. 그는 “회원들이 남의 집에 탁구 치러 왔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커뮤니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탁구 선수 출신이 아니다. 광운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어린 시절 탁구에 매료된 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탁구 동아리 창단멤버가 됐다. 전공 공부보다 동아리 활동에 매진했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하고 9년간 대기업 계열사와 부동산 사무실 등에서 일했다. 그때도 마음은 늘 탁구에 있었다. 그는 “일 때문에 건물을 보러 다닐 때에도 탁구장 자리만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운동도 더 열심히 했다. 98~99년에는 실업 선수 출신이 운영하는 탁구장을 찾아가 본격적인 레슨을 받았다. 18개월간 매일 한 시간씩 특별 교육을 받았다. 그는 “비선수 출신인 데서 오는 경기력 향상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다”며 “나중에 계산해 보니 레슨비로 지출한 돈만 1000만원”이라고 말했다.

 2001년 고양시 성사동에 탁구대 5대를 놓고 창업했다. 탁구장의 가장 큰 장점은 고정지출이 없다는 점이었다. 인테리어·마루·탁구대 등 초기에 투자비를 쓰고 나면 월세 외에는 추가로 나가는 돈이 없다. 회비 곱하기 회원 수가 월 고정수입이 됐다. 여기에 지나다 들르는 일반 손님 수입이 추가된다. 대개 회원과 일반인의 수입 비율은 7대3 정도다. 주부반·학생반·직장인반 등으로 나눠 운영하던 성사동 탁구장은 제법 장사가 잘됐다. 그는 더 크게 사업을 시작할 마음으로 서울로 진출했다. 서울 진출 초기엔 천호동에 탁구대 26개가 놓인 대형 체육관에 월급쟁이 관장으로 취직했다. 이곳에서 그는 대규모 탁구장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배웠다. 그는 “고정비·지출·수입관리부터 회원모집 방식까지 다양한 노하우를 꼼꼼하게 배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탁구장 주인에서 코치, 다시 주인으로 직업을 바꾸면서도 그는 2001년 연 탁구 관련 사이트 ‘오케이 핑퐁’은 계속 운영해 오고 있다. 오케이 핑퐁에는 탁구 장비부터 각종 대회, 선수 정보까지 탁구 관련 모든 정보가 모여 있어 동호인들 사이에 ‘탁구계의 포털’로 불린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 대표에게 왜 ‘탁구교실’이나 ‘탁구클럽’ 같은 세련된 이름을 놔두고 ‘탁구장’이라고 상호를 붙였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탁구장은 술 한잔하다가도 친구와 의기투합하면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세련된 이름을 붙여 놓고 유니폼에 탁구 전용 신발까지 신은 이들이 경기하고 있으면 일반인들은 다시 오지 않으려 하지요. 탁구장 문턱을 주인들이 스스로 높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편하게 한번 왔다가 재미를 느끼고, 회원들과 어울리면서 삶의 재미를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게 하는 게 탁구장 주인의 역할이지요.”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탁구는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거든요.”

글=박태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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