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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본「혼례간소화」-고려·이조의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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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정부에서 가정의례준칙을 법제화하여 법을 어기는 이들에 대해 벌금을 물러서라도 실천케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가정의례간소화의 준칙은 1969년에 제정하여 그동안 권장해 오고 있는데, 점차 간소화 경향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관혼상제의 예를 왕왕히 성대하게 베푸는 습속이 있었다.
특히 혼례의 경우 더욱 사치해서 고인들이 개탄한 기록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남보다 호사치레를 하고싶어 하는 것은 인지 상타 이지만, 그것을 다투어 거드름 부리는 것은 옛날에도 지체가 높거나 재산 있는 특정인들이었고, 그 풍조가 온 사회에 인습화할 때 커다란 폐단을 빚어내곤 하였다.
혼례에 있어 사치를 극하여 상류사회에 커다란 폐단을 불러일으킨 것은 고려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왕실이 원나라와 국혼 함에 있어 그러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 말 신우왕은 왕위에 오르자 곧 교지를 내리어 『백성들이 검소치 아니하고 사치로써 재물을 허비하니 금후에는 금수와 욱필과 금옥 기명을 일체 금한다.
혼인함에 있어서도 명주·모시·삼베를 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공명왕 때 중낭장 벼슬의 방사량이 『비단금침을 마련치 못해 혼기를 놓치고 인륜을 그릇 치는 자가 빈번하다』고 외국 물건 사용금지 안을 왕에게 진언한바 왕이 그를 좇았다고 한다.
그러한 사치 풍조는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도 답습되었던 것 같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가난한 사대부 집의 딸이 과년하도록 혼인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정에서 물자를 주어 혼례를 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조초엽의 대학자 성현은 허례의 폐단을 지적하여 『옛날에는 납폐에 오로지 의포소물만 사용했는데 근자엔 모두 채단을 넣는다. 뿐더러 많은 자는 수10필을 쓰고, 적어도 수필씩에 달한다』(용재총화)고 했다. 또 양성지는『혼 석에 하인을 시켜서 재물을 지워 앞세우고 가는데 만일 그리 못한즉 친척들이 모두 비웃으니 이 무슨 예속인가』(눌재집)고 개탄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폐습을 없애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부득이 납폐와 성혼날짜를 미리 관아에 신고하게 함으로써 허례허식을 살피게 한 일도 있다(대전후견집·혼가조). 따라서 그를 살피지 않을 때는 그 관아를 문책하는 것이었는데 때로는 관아에서 나오는 취체판(의녀)에게 무명홍삼을 거짓 내보이며 뇌물을 주어들려 보내고는 금의로 바꿔 입는(윤선거의 노서유교)웃지 못할 폐단까지 생겼었다.
결혼비용이 없어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예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터이지만 옛날 행세하는 양반 집에서는 더욱 심했던 것 같다. 영조9년에 간관 안상휘이 아롸기를『일반가정의 혼사 납폐에 있어 여러 사람이 적어도 1백금이상 내려야 하는데 가난한 자는 그를 마련할 길이 없어 40,50세가 넘도록 아내를 맞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례 의에 의하여 혼기를 넘기는 자는 그 가장을 치죄하여 이사치한 풍조를 혁파하소서』하니 왕이 이를 좇았다.
현종 때의 선비 남구만은『신부가 시집에 바치는 그릇 수에는 정제가 있는 법인데 일전에 돈령 도사 이정한 집에서 그 수를 함부로 지나쳤으니 마땅히 파직해야한다』고 장소 하였다.
또 인조 때의 이직은 『사대부 집에서는 혼례를 치른 다음날 비로소 신부를 보고 후 한 예물을 내린다. 그러나 그 비용이 법에 제정한 것보다 10배나 더하니 매우 어긋나고 외람된 일』이라고 지적하고 또 그 잔치가 장터와 같이 잡담하니 자손에게 보여 배워줄 바가 전혀 없다』고 개탄하였다(택당집).
이로써 단편적인 역사기록들을 통하여 허례허식의 작폐와 국속을 바로잡으려는 뜻 있는 이들의 진언을 열거해 보았다. 한 두 사람의 분수 없는 허례는 그의 가산을 탕진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륜의 정도와 사회의 안정까지를 위협하는 결과를 빚어낸다는 본보기의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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