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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막판 엎어치기 명수 … 마오보다 독한 사람”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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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가을, 덩샤오핑. 백단대전(百團大戰)을 치르던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 시절이다, 사단장 류보청(劉伯承)의 훈시를 졸면서 듣고 있다. [사진 김명호]

1978년 3월, 덩샤오핑이 정치협상회의 주석에 선출됐다. 당 부주석, 정치국 상무위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복직한 지 8개월 만이었다.

5월 20일 타이베이,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중화민국 총통에 취임했다. 당일 오후신임 총통 주재 아래 정보기관장 회의가 열렸다. “이제 대륙은 덩샤오핑의 천하다. 정치협상회의 주석까지 꿰찼다. 화궈펑은 있으나마나다. 의견들을 말해 봐라.”

생각들이 거의 비슷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비해 온건한 편입니다. 장차 양안관계도 완화될 겁니다.” 장징궈의 생각은 달랐다. “덩샤오핑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다. 나는 덩샤오핑을 잘 안다. 소련 시절 함께 공부했다. 마오쩌둥보다 더 독한 사람이다. 일단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일을 풀어나가는 묘한 재주가 있다. 한마디로 막판 엎어치기의 명수다. 뭐가 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질 테니 두고 봐라.” 장징궈의 덩샤오핑에 대한 평가는 정확했다.

1977년 3월, 중앙공작자회의에서 화궈펑은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마오 주석이 생전에 내린 결정을 준수해야 한다. 마오 주석의 형상에 금이 갈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은 결단코 제지해야 한다”며 예젠잉·천윈 등 당 원로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단, 덩샤오핑의 복직 문제에는 한발 물러섰다. “덩샤오핑은 천안문사태와 상관이 없다. 서두르지 마라.”

사태를 관망하던 덩샤오핑은 화궈펑과 예젠잉 앞으로 각각 편지를 보냈다. “나 개인의 복직은 언제라도 상관없다. 당 중앙의 고려와 안배에 따르겠다. 우리는 대대손손 정확하고 완벽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전 당과 인민을 지도해야 한다. 내 의견이 타당하다면 이 서신을 76년 10월에 보낸 것과 함께 당원들에게 배포하기 바란다.” 마오쩌둥이 내렸던 결정을 무조건 준수해야 한다는 화궈펑의 주장에 대한 비판이나 다름없었다.

서신은 23일간 권력의 중심부를 돌고 돌았다. 소문이 안 날 리 없었다. 화궈펑과 왕둥싱은 당원들에게 공개하자는 예젠잉의 제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덩샤오핑은 4인방 체포 직후 화궈펑 주석의 취임에 환호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이번 편지도 화궈펑의 지위를 인정했다.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1978년 8월, 화궈펑이 국무원 총리 자격으로 유고슬라비아 중앙시장을 방문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서신은 당원들을 열광시켰다. 사방에서 복직을 외쳐댔다. 화궈펑은 왕둥싱을 불렀다. “덩샤오핑을 복귀시킬 방법을 강구해라. 내 밑에서 충실하게 일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덩샤오핑을 만나 봐라.”

5월 24일, 이른 점심을 마친 왕둥싱은 중앙판공청 부주임 리신과 함께 덩샤오핑을 방문했다. “복직이 가능하다. 전제가 있다. 마오 주석은 천안문사건으로 너를 공직에서 퇴출시켰다. ‘당시 마오 주석의 결정은 영명했다’는 성명서를 제출해라. 서신 형식이면 된다.”

왕둥싱은 과분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971년, 마오쩌둥 암살 혐의를 받던 2인자 린뱌오(林彪·임표)가 중국을 탈출했다. 몽골 사막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자 유배 중이던 덩샤오핑은 쾌재를 불렀다. 마오쩌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저는 그간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류샤오치·펑더화이 모두 나쁜 놈들이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엔 똑똑하더니 날이 갈수록 미련한 짓만 골라서 한다는 주석의 지적은 옳았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 서신을 계기로 덩샤오핑은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원로들의 지지를 확신한 덩샤오핑은 왕둥싱의 제의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반나절간 얘기를 나눴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복직을 안 해도 상관없다. 천안문사건은 반혁명 사건이 아니다. 군중이 자발적으로 저우언라이를 추도하기 위해 광장에 운집했다. 나는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지 않았다. 스스로 비판할 이유가 없다.” 이어서 화궈펑의 주장을 비판했다. “마오 주석의 사상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주석의 유지를 따르지도 않으면서 주석이 생전에 했던 결정과 지시를 준수해야 한다니 어처구니없다”며 두 가지를 예로 들었다. “마오 주석은 4인방을 못마땅해했지만 타도해야 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며 작은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상반기에 해결 못하면 하반기에 하면 된다. 금년에 못하면 내년에 하고, 내년에 못하면 그 다음해에 하면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주석이 세상을 떠나자 화궈펑은 장칭을 체포했다. 주석의 뜻에 위배된다.”

화궈펑이 제의한 마오쩌둥기념관과 유체 보존도 걸고 넘어졌다. “화궈펑은 모순 덩어리다. 1956년 4월 27일, 주석은 화장(火葬) 동의서에 서명했다. 2년 후엔 ‘생전에 물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다. 빚을 갚아야 된다. 골회(骨灰)를 바다에 뿌리라’고 분명히 지시했다.”

왕둥싱은 어안이 벙벙했다. 뭔가 대단한 이유라도 있는 것 같은 권력투쟁도 애들 싸움과 별다를 바 없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의외였다. 덩샤오핑은 1971년의 덩샤오핑이 아니었다. 한 해 전 10월 화궈펑에게 납작 엎드리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왕둥싱은 무릎을 쳤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아니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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