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믿음] 부부싸움과 어리석은 침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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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호 27면

도심에 머물다 보면 한밤중에도 시끄러울 때가 있다. 원인은 이웃집 부부싸움이다. 연말이 가까워오니 모임이나 바깥일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허공을 찢는 고음이 한밤의 고요를 깬다.

그런데 이상하다. 소리의 주인공은 늘 여자다. 여자 목소리만 쩌렁쩌렁 동네를 울린다. ‘남자 목소리는 왜 안 들리지?’ 이상하게 여기는 순간 “제발 무슨 말이든지 좋으니 말 좀 해봐요. 말 좀 하라고요.” 울음 섞인 여자 목소리가 분노로 떤다. 그제야 알았다. 아내의 그 어떤 추궁에도 남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여자가 가엾다. 남편에게도 사정은 있겠지만, 어쩜 저렇게 아내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며 단 한마디도 안 할 수 있을까.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알다시피 ‘침묵’에는 강한 힘이 있다. 말과 글이 난무하는 세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힘이 좋은 쪽으로 발휘됐을 때는 심오한 통찰력을 가진 지혜의 눈을 우리에게 제공하지만 나쁜 쪽으로 작용했을 때는 모든 인간관계를 무너뜨린다. 상대에게 무시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고, 그로 인해 심한 분노를 일으킨다. 그런 침묵을 일러 불교에서는 ‘어리석은 침묵’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고집이 아주 센 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그들에게 떡 세 개가 생겼다. 부부는 떡 한 개씩을 나눠 먹고는 나머지 한 개를 양보하지 않고 서로 먹겠다며 말씨름을 했다. 그러다 내기를 하게 됐는데, 끝까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나머지 떡을 먹기로 했다.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았는데, 밤이 되자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방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훔쳐 조심스레 쌌다. 그때 마침 잠이 깬 부부는 입을 봉한 채 도둑이 하는 거동만 빤히 쳐다보았다.

도둑은 그들 부부가 이상하다고 여기며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에 용기를 얻어 이번에는 부인을 범하려고까지 했다. 그래도 남편은 나 몰라라 쳐다만 보고 아무 말이 없었다. 참다 못한 아내가 “도둑이야”라고 고함을 치며 남편에게 대들었다. “이 미련한 사내 같으니라고. 그래 그깟 떡 한 개 때문에 도둑이 제 아내를 범하려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단 말이야!”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그럼 이제 이 떡은 내 거야.”

내가 보기엔 이 우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남편의 침묵이나 이웃에서 부부싸움 하던 남편의 침묵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떡 하나 때문에 집안 살림과 아내까지 도둑맞도록 입을 다문 것이나,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까지 대화를 거부하고 신뢰가 깨지도록 만든 것이나 둘 다 어리석은 침묵이기는 마찬가지다.

침묵을 하더라도 지혜롭게 해야 한다. 마음공부를 하거나 상대방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나 하는 것이다. 침묵은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와 소통하게 만든다.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신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정확한 통찰력을 키울 수 있게 해줘 삶의 어려움을 순조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침묵’이다.

연말이니 평소보다 따뜻한 마음을 나눌 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소통에만 예의를 차리고 대할 게 아니라 내 곁의 가까운 이들에게 그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떠한가.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은 결국 지금 내 옆에 있는 법이다.



원영 조계종에서 연구·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아사리. 불교 계율을 현대 사회와 접목시켜 삶에 변화를 꾀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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