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68)제30회 서북청년회(2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청의 완력은 거리만을 노린 것이 아니다. 학원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목표였다.
당시는 서울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가와 일부 고교마저 좌·우 파동에 휩쓸려 혼란에 빠져있을 때.
민주학생연맹 등이 주동이 된 좌익 측은 교정에서 공공연히 적기가를 부르고 이른바「학습·조직」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비라」 살포·교직원 배척 등 과격전선을 펴며 이철승씨의 전국학생총연맹·전국청년회(양재건·국회의원역임)·기독교학생회·서북학련·전국고학생연맹(전성종) 등 우익측 조직과 맞붙고 있었다.
그중 소란이 극렬했던 곳은 국대안 파동까지 겹친 서울대.
좌익 측 학생들은 우익 측을 『서울대 파괴분자』로 몰아 교실에 넣지도 않았고 문리대교수 도상록(김일성대 교수·물리전공)을 핵으로 한 그들 교수들은 이쪽 교수진을『반역』이라며 담당시간을 뺏고 자기들 멋대로 시간표를 짜는 등 정상수업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이 통에 우익 측은 그들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며 강의를 하고 시험을 보았으며 그러다가 들키는 날이면 맥주병·장작개비·돌멩이·벽돌 등의 무차별 세례를 받기 일쑤였다.
실제 현 중앙 공업연구소 구 실험관에서 몰래 시험을 보이던 서청 초대학생부장 송태윤 공대교수는 벽돌짝에 안면을 맞아 3∼4일 동안 입원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각 학장 자택엔『사표를 내지 않으면 가족들을 몰살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장과 함께 수류탄·화약병 등이 날아드는 판이었다.
돌멩이 투척은 차라리 약과였다.
이 같은 사정은 고려대·연희대·성균관대·「세브란스」의대(서울역앞)·한국대(학장 한관섭·광희동 시구문 뒤 언덕)·국민대·숙명여대 등 여타대학도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가 있을 뿐저마다 좌·우 열병을 앓고 있었다. 잠잠했던 곳은 이대 하나-.
한편 서청은 수많은 월남학생(중·대)들에게 취학의 길을 열어 줘야하는 심각한 학원고민을 안고 있었다.
당시 월남 학생들은 몰래 넘어 오느라고 졸업 및 수료증을 떼오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 때문에 자신의 학력을 증명할 길이 없어 각급 교편·입학이 모조리 막힌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광화문 서청 총본부를 찾아와 딱한 사정을 호소하는 이들 학생들은 하루에도 20∼30명이나 됐다.
「무소불통」으로 알고 서청에 매달리는 이들 학생들의 애원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거-.
이 같은 상황아래 벌어진 서책의 학원 활동은 일면 취학 알선, 일면 투쟁의 양면 작전으로 나뉘어지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화급한 작업은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월남 학생들을 하루빨리 편·입학이 되게 뒷받침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북학생들이 속속 학원에 들어가면 반좌학생 투쟁은 저절로 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편·입학 추진작업, 그것은 서청 최대의 보람이었다.
이 작업은 47년 1월말 2대 학생부장에 앉은 김계룡 동지(57·김구선생 기념 사업회 이사)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동지는 임정계인 본정함북청 (위원장 윤재현·현신도 「호텔」1층 소재)선전부장을 지낸 무산 출신.
그는 당시 문교부장이었던 유억겸씨를 움직여 서육이 서북출신 학생들의 학력을 출신학교 대신 확인해 주는 권한을 받아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김동지가 이 학력증명서 발급 권한을 얻어낸 것은 순 어거지에 의해서였다.
그가 유부장을 중앙청으로 방문한 것은 2월3일.
그날 처음 만난 전부장의 반응은『우리도 서북학생들에 대한 구제책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다』라는 미온적인 것이었다.
『서북청이면 다인 그때』 (김동지의말) 뜻밖에 푸대접을 받은 김동지는 대뜸 웃도리를 벗어젖히고『말 다했소』하고 주먹을 번쩍 치켜 들었다. 그때 전부장은 70 객이었지만 정 수가 몰리면 「테러」를 불사하겠다는 시위였다.
김동지는 일제 때 전 일본학생 야구 「올·멤버」인 데다가 함북「스피드·스케이트」선수권자. 유부장은 이 김동지의 올퉁불퉁한 근육 앞에 놀라선지 갑자기 태도릍 바꿔 OK를 선언했다.
그 이튿날로 김동지는 『①서북에서 월남한 학생은 전·입학제 증명이 없는 고로 서청위원장의확인증명으로 대치해 줄 것 ②이를 실행하기 위해 문교부장은 전국 각급 학교에 이상과 같은 내용을 시달할 것』이라고 쓴 공문 (요구조건)을 작성, 선우기성 위원장의 도장도 맡지 않고 자기도장만 찍어 문교부에 갖다 냈고 이는 즉각 전부장의 결재가 나 4일 뒤 전국학교에 통고됐다.
말을 꺼내 6일만에 올린 개가 였다. 몰론 이 같은 속결은 명부장의 넓은 배려에 의한 것이겠지만 김동지의 서청과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촉진제였다.
서청이 떼준 문서 이름은 그냥 『확인증명서』-. 학력증명이란 단어도 안 들어가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서청은 이 확인증명서를 갱지에 「프린트」, 수부에 쌓아 놓고 본인이 부르는 대로 써 넣은 뒤 선우기성 위원장의 도장을『쾅쾅』찍어 마구 발행해 줬다. 말이 확인이지 본인 말대로 다 되는 순 엉터리 확인이었다. 서청이 사실을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각급 학교에선 웃지 못할「난센스」가 꼬리를 물고 빚어졌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