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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게릴라」전과 장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조지·맥아더 기>
【로스앤젤레스·타임스=본사특약】「웨스트 모얼 랜드」장군은 이 전쟁에서 비극적 인물이 되었다. 「웨스트포인트」졸업생인 그는 2차 대전 때 공정대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그의 용기는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지만 월남전을 통해『일차원의 인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월남전이 정치적인 성격을 갖고있다고 말했지만 그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주월 미군사령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는 1백만 이상의 대군을 지원할 수 있는 군수체제를 확립해놓고 꽤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이런 노력 때문에 월남군자신의 선도역할이 질식되고 있다는 점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대조적인 미군 두 사령관>
후임인「에이브럼즈」대장 역시 월남전전반에 관해「웨스트 모얼 랜드」장군 못지 않게 강경파였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와는 정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웨스트 모얼 랜드」는 마치「유니폼」에 맞게 찍어놓은 듯한 규격화한 인물이었고「에이브럼즈」는 유니폼을 입고 잠을 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웨스트 모얼 랜드」는 기자회견을 자주 가졌지만 종군기자들에게 인기는 없었다. 그러나「백·그라운드」만을 설명할 뿐 4년 동안에 한번도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던「에이브럼즈」는 오히려 인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주월 특파원들과의 전반적인 관계에 있어서는「에이브럼즈」가「웨스트 모얼 랜드」보다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종군기자들과 사적으로 저녁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흥분한「에이브럼즈」는『당신들과 같은「후레자식」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말은 안 믿는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후에「후레자식」이라고 기자들을 지칭했던 점에 대해 그는 어쩔 수없이 사과했다.
1966년에 이르러 월남개입에 대해 미국 내 여론은 다시 악화했다. 그러자 정부는 TV를 비롯한「뉴스·미디어」에서 월남전을 객관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아드랑」협곡의 전투로 알려진 군사적 대결은 쌍방간에 전술개념을 시험하는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수색·파괴의 소모전>
1965년 10월「하노이」는 월맹정규군 32, 33, 66 연대를「플레이크」부근 중부 고원의「정글」지대에 투입했다.「웨스트 모얼 랜드」장군은 이것이 월남을 둘로 분할하려는 그들의 책략(「프랑스」군을 지구전으로 끌어들일 때 사용했던「지압」의 전술과 같은)이라고 결론지었다.
「지압」은 그의 정규군이 미군의 화력과 기동성 있는「헬리콥터」전략에 맞설 수 있는가를 시험할 의도임이 명백했다.
당시 15만 명에 달했던 미군은「헬리콥터」, M-16「카빈」등 신예전투장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실전경험이 없던 정예 제l공륜사단은『피를 맛볼』기회로 생각했다.
한달 간의 치열한 혈전 끝에 월맹정규군은 「캄보디아」로 퇴각했으며 주월 미 지원 사(MACV)는 월맹 3개 연대가 1천8백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다.「웨스트 모얼 랜드」도 실전에 첫 투입된 미군이 실력발휘를 한『시기에 적절한 승리』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월맹은 미군폭격기 및「헬리콥터」의 막연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월맹군이 적지에서 한달 동안 훌륭히 싸웠으며 장래의 전투에 큰 자신을 가지고 후퇴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아드랑」전투가 끝났으나「정글」은 어느 쪽에 의해서도 장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월맹군은 피를 흘렸음에도 여전히 완강했고, 싸움은 쉬 끝날 것 같지 않았다.「웨스트 모얼 랜드」나「지압」모두가 병력의 증강이 급선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수한 대소규모 작전들이 끊임없이 계속됐다. 크건 작건 간에 이들 작전은 똑같이 수색·파괴작전이었으며 막대한 시간과 인력이 소모되는 전투였다. 어느 우수한 미군사단 지휘관 한사람은 사적으로 이런 슬픈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나는 근 1년 동안에 1개 사단규모의 부하를 잃은 셈이지요.』그러나 머리가 좀 둔한 지휘관들은 아무런 회의도 없이 그저 마구병력을 쑤셔 넣기만 했다.

<주민호감 잃은 미군작전>
결국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미군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확립했지만 처음에는 모두들 어떤 식으로 전쟁을 해야하는지 어리둥절했다. 각 단위부대지휘관은 뚜렷한 상부지침 없이 자신의 견해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고 그래서「밀라이」학살사건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되었다.
월남 어도 전혀 모르는 젊은 장교들을 주민 틈에 위장, 잠복한 적을 소탕하는 작전에 보내기도 했다.
그 결과 수백 명의 순수한 민간인들이「베트콩」용의자로 잡혀 20∼30「마일」떨어진 심문장소에「헬리콥터」로 실려와 심문을 당한 후 월남인 조사 관으로부터 귀향 증을 받고야 석방되는 사례를 빚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야「보디·카운트」(확인된 적 시체 수)는 올라갈지 모르지만 주민들의 호의를 못 얻는 게 뻔했다. <계속>

<차례>
①미국의 개입
②확전의 불길
③「게릴라」전과 장군
④공중전 논쟁
⑤전쟁과 정치주역들
⑥춘계공세와「명예로운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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