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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미국의 개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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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지·맥아더 기>
월남전이 끝나가고 있다. 2차대전이래 가장 오래 격렬하게 전개되어온 이 전쟁은 그 특수한 성격 때문에「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2차대전 후의 최대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경주재 AP특파원으로 한국전쟁에 종군 취재한바있는 현「로스앤젤레스·타임스」「사이공」특파원「조지·맥아더」기자의 특별기획을 통해 복잡한 월남전의 이면을 파헤쳐 본다.
월남전은 세계 전사 상 가장 면밀한 검토와 연구대상이 되어왔지만 학자들간에는 전쟁발발의 정확한 시기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종전자체에 대해서도 상당히 회의적이다.
「구엔·가오·기」전 월남부통령은 한때『월남에서는 유언비어 중 90%가 진실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키신저」미대통령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은 4년 전 협상을 시작하면서『월남의 「딜레마」는 이 전쟁에 대한 거의 모든 평가가 진실하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러한 진실 된 평가가 타당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라고 말했다.
월남전에 관한 타당성은 날마다 변한다.「찰즈·브레이」미국무성대변인이 어느 날 복잡한 월남사태「브리핑」을 하다가『어느 날 아침해가 서쪽에서 뜨게 될지도 모르는 어리둥절한 상황』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바 있다.
전쟁자체는 그 기괴한 모습을 매일같이 드러냈지만 월남이라는 나라와 국민들의 모습은 왕왕 장막 속에 가려져 왔다. 월남전의 첫 희생자의 아버지는 지도에서 월남을 찾아봐야 할 정도로 월남을 알고있지 못했다.
월남에 대한 농담으로 이런 것이 있다. 막 월남전에서 돌아온 병사가「택시」를 탔다. 『어디서 오는 길이요?』운전사가 물었다.『사이공』이라고 병사가 짤막하게 답하자 운전사는『거긴 월남보다 낫겠군. 월남선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데』-라고 응수하더라는 것이다.
근 3백만 명이나 되는 미군이 월남을 거쳐갔지만「지·아이」은어에는 월남 어가 거의 섞여들지 않았다. 단 한마디「디마우」가「지·아이」은어가 되었는데 이 말은『황급히 이곳을 떠나라』는 뜻이다.
「키신저」가 말한 타당성의문제를 보자.「사이공」정부가 부패했다든 가, 대 월남군사원조가「트루머」시점부터 시작되었다든 가, 사상 가장 오랜 전쟁을 대항하면서도 미국은 월남과 단 하나의 공식 쌍무 협정도 없다든 가 하는 사실은 월남전을 운위함에 있어 타당한 것인가? 앞으로 올 수십 년 동안에 사가들은 아마「인도차이나」전쟁을 하나의 전쟁으로 묶어서 이야기할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 전쟁은 2차 대전·한국전 및 중공과 일본의 재등장과 태평양에 있어서의 미국의 역할이라는 문제 뒤에 따라온 고통스러운 상황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또 역사적으로 두드러진 특성을 갖고 있다. 4만5천9백명 이상의 미국인을 포함하여 1백50만명 이상이 사망하였으며 전쟁비용도 1천5백억「달러」를 상회하고 있다.
미군이 사용한 폭탄과 포탄의 분량은 재래의 모든 전쟁에서 사용한 분량의 총계를 능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들은 이 전쟁이 역사에 남을 이유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쟁은 3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며 기회를 노려온 호지명이 창설한 공산당과 월맹 인들의 놀라운 인내로 지속되어 왔다. 69년 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이미 국제공산당의 지도자의 계열에 들어있었다.
후세의 사가들은「디엠」대통령의 살해와 이에 대한 미국청부의 죄의식이 63년이래 비롯된 미국 측 확 전의 주요 요소였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미국은 끝내 용기와 고집의 한계를 구별해 낼 수 없게 했던 이 바라진 인물에게 유별난 애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월남에서의 미국의 정책방향이 결정되던 아리송한 과정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당시의「아이젠하워」대통령이「디엠」이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54년 그에게 보낸 서한을 들추어낸다.
이 서한은「콜린즈」장군과 같은 고위장성이 월남을 방문하고 군사고문단의 증강을 결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의 월남에 있었던 미군숫자는 실종된 조종사의 시체를 수색하기 위해 2차 대전 후 도착했던 소규모의 단위에서 상당한 양적 증가를 보여 6백85명에 이르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서한이래 미국의 원조가 상승추세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트루먼」행정부도 마찬가지로「사이공」정부로부터의 원조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디엠」정권에 처음 상당한 양의 원조를 제공한 인물이「아이젠하워」대통령이기는 했으나 그는 그 이전에 직접 개입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일은 1954년「디엔비에푸」요새의 함락시기에 있었다.
궁지에 몰린「프랑스」는 주로 폭격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원조를 애타게 호소했다.
영국이 이때 개입하기를 원치 않았으므로 미국으로서도 단독으로 이 사태에 개입하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조지·맥아더」약력, 한국전쟁도 취재>
48년 AP통신기자로 들어가 동경·「제네바」·「파리」·「카이로」·「마닐라」특파원 역임. 주로 외교관계 분야에서 활약해왔으며 특히 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한국전선을 취재하여 익명을 날렸다. 그는 67년부터 69년 사이 AP「사이공」특파원을 지냈으며 현재는 「로스앤젤레스」지「사이공」특파원으로 근무하고있다.【로스앤젤레스·타임스=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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