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두 번째 오늘을 살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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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떨쳐버리려 해도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순간이 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보다 만족스럽게 바뀌어 있지 않을까, 미련으로 버무려진 기억이다. 올 한 해 이런 통탄의 순간을 남기고야 말았다면, 이 영화를 권해 본다. 5일 개봉한 영국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이다.

 영화는 막 성인이 된 팀(돔놀 글리슨)이 아버지에게 놀라운 비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집의 남자들에게는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이 전해 내려온다는 이야기다. 벽장이나 화장실에 숨어 주먹을 쥐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만 떠올리면 된다니 방법도 참 간단하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한 청년이 바라는 것은 오직 사랑뿐. 여자 앞에서 어설픈 행동으로 기회를 날렸던 순간을 리플레이, 굴욕으로 얼룩졌던 연애사를 만회해 보기로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 [사진 UPI 코리아]

 이후의 전개는 예측 가능하다. 주인공은 시간이동 능력을 이용해 첫눈에 사랑하게 된 메리(레이철 맥애덤스)와 맺어지지만, 다른 일들까지 모두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가족에게 닥치는 불행을 막아보고자 시간여행을 하고 나면 현재의 인생이 미묘하게 꼬여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후회로 얼룩진 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완벽한 인생이 가능할까. ‘노팅 힐’(1999)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의 각본을 쓰고, ‘러브 액추얼리’(2003)에선 연출까지 맡았던 ‘믿고 보는 감독’ 리처드 커티스는 위트 있는 설정과 대사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 뻔한 질문의 답을 꽤 설득력 있게 전한다.

 영화 말미에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도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아버지(빌 나이)가 아들에게 조언한다. “네 능력을 이용해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다시 살아보라”고. 처음 경험하는 하루는 늘 그렇듯 피곤함과 무표정, 자잘한 스트레스로 채워진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도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시작하는 두 번째 하루, 주인공은 짜증스러운 순간에도 동료에게 농담을 던지고 매일 보는 커피숍 점원에게 환한 미소를 건넨다. 인생의 대부분은 딱히 리플레이할 이유 없는 소소한 하루들로 채워진다는 것, 그러니 주어진 순간순간을 유쾌하게 즐기며 돌파하자는 심플한 메시지다.

 연말에 선물 같은 영화를 만난 덕분에 2014년 계획은 ‘실없이 웃자’로 정해 버렸다. 그러니 새해, 까닭 없이 웃고 있는 한 여자와 마주쳐도 놀라지 마시고 시원한 답웃음 한번 날려주시길 부탁드리며.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