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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내리는 데|이효선 지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침부터 날씨가 구물구물 흐리더니 점심때에는 눈발이 서서, 부스러기 같은 눈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아랫목, 할머니가 누우신 요 밑에 발을 묻고 그림책을 읽던 숙이는 슬그머니 잠이 들어 새근새근 코를 곤다.
그 소리에 할머니는, 애구구 애구구 힘들게 일어나 옷자락을 밀어 덮어준다.
에그 고것, 어서 학교엘 가야지, 하루 종일 심심해하는 꼴이…. 할머니는 일어난 김에 미닫이에 붙인 조그만 유리조각을 내다보니, 솜 같은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얘, 용아-, 눈 오신다-. 할머니는 미닫이를 열고 아랫방 쪽에다 소리를 지른다.
3학년 짜리 용아와, 6학년 짜리 누나 순이가 방학 숙제를 하다가, 연필을 내던지고 미닫이를 홱 열어 젖혔다.
『크리스머스엔 눈이 안 오고….』 순이는 미닫이를 짚고 서서 방글방글 내다보고, 용아는 껑충 뜰로 내려선다. 뜰은 어느새 눈밭이 되어 발이 푹푹 빠진다.
용아는 눈을 긁어모아 뭉친다. 손이 시리다.
『누나, 저기 내 장갑 좀 집어 줘.』
『어디?』
『저 책상 밑에 있잖아.』
『조게 공부 안하고….
『공부, 공부하게 됐어, 함박눈이 오는데…, 누나도 나와-.』
밖에서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 온다.
용아는 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누구냐, 용아냐?』
『응, 용아 나갔어-.』
설을 차리느라고 부엌에 있던 엄마가 그제서야 내다본다.
아침부터 즐겁기만 한 엄마는 한 뼘이나 쌓인 장독대의 하얀 눈을 보니 빙그레 웃음까지 나온다.
새해! 새해엔 숙이가 1학년이 되고 용아는 4학년, 순이는 중학생이 된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자랐다는 대견한 생각이 든다.
은행에 다니는 아빠도 내년엔 대리가 될거구…. 엄마는 아무 걱정이 없다. 엄마는 눈을 맞고싶다. 뜰로 내려선다. 눈송이가 얼굴을 간지린다.
웃음이 자꾸 나온다.
『엄마 눈맞아, 나도…』.
내다보고 섰던 순이도 엄마가 웃으니까 따라 웃음이 나오고 엄마 옆에서 눈을 함께 맞고싶다.
엄마 머리에도, 순이 머리에도 눈이 하얗게 쌓인다.
유리쪽으로 내다보고 앉았던 할머니는 숙이를 흔들어 깨운다.
『얘야, 숙아, 눈 온다, 눈 와-.』
『응, 눈!』
숙이는 발딱 일어나 눈을 비비며, 내다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간다.
뜰에 엄마와 순이가 벙글벙글 방글방글 나란히 눈을 맞고 섰다. 숙이는 신이 난다. 진작 깨워 주지 않은 할머니가 좀 미운 생각이 들어 눈을 흘긴다.
『할머닌, 왜 인제 깨워!』
숙이는 팔짝 뛰어내려 엄마 옆에 가 손을 잡고 쳐다본다.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니, 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온다.
『눈 참 크지, 엄마. 참 많이 왔지!』
숙이 머리에도 눈이 쌓였다. 모두 할머니가 되었다.
『붕-.』
버저가 울렸다. 숙이가 냉큼 뛰어나가 문을 열었다. 아빠가 선물을 한아름 들고 돌아 왔다.
『그거 뭐야, 이리 줘.』
『무거워서 넌 못 받아.』
엄마도 순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이게 웬 일야, 눈을 맞고 섰으니, 허허허…. 』
할머니도 유리창으로 내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다. 그저 대견하기만 했다.
모두들 즐거워하니 할머니도 따라 즐거웠다.
『자, 감기 들라, 어서 옷 털고 들어가자. 선물 사 왔어, 이건 할머니 드릴거구.』
할머니는 아빠가 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변했다.
(내가 내년 겨울을 또 살는지? 나두 아잇적엔, 아니 젊었을 땐…. )
할머니는 『끙』 하고 일어나 두루마기를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숙이의 방울 달린 빨간 털모자를 눌러쓰고 마루로 나왔다.
『할머니, 어디가-?』
『아니다, 가긴. 나도 너희들처럼 눈을 맞으려구.』
순이와 엄마가 얼른 마루 끝에가 할머니를 부축하고 뜰로 내려섰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아빠가,
『숙아, 너 오빠 잠깐 들어오라고 불러라. 요 앞에 있더라. 사진 찍는다구 그래.』
아빠는 사진기를 맞춰 놓고, 온 식구가 나란히 섰다. 할머니도 눈을 맞으며 숙이처럼 방글방글 웃으신다.
그러나 셔터가 눌릴 때 할머니의 얼굴이 쓸쓸해 진 것은 아무도 모른다.
눈송이는 점점 커져 펑펑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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