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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영암 참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삼단같이 검은머리에 쪽진 은비녀가 옛 아녀자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됐던 것은 검고 윤기있는 머리를 빗어 넘기는 성근 참빗 때문이었다.
들기름을 먹인 장지를 네모지게 접어 그 속에 크고 작은 빗들을 알뜰히 담아두던 정성. 그런 것들에 대한 추억같은 것은 이제 아련해졌다. 농촌에서 마저 쇼트 컷 한 머리를 플라스틱제의 헤어 브러쉬로 슬적 빗으면 그만인 지금에는 참빗이란 게 팔릴 턱이 없다.
참빗은 대로 살을 깎아 만든 것으로 일명 진소. 그 생산지는 예부터 전남담양과 영암이 이름났다. 생산량은 담양이 더 많고 또 요즘 품질이 향상되고 있으나, 상품은 역시 영암산. 그 중에도 영암면 망호리 경주이씨 가문 1백 65호 중 40여호가 참빗 만드는 일을 하고있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시절에 참빗을 만드는 일과 같은 장인의 일을 업으로 삼은 것은 이 마을의 유일한 예외였다고 이부출 노인(72)이 일러준다.
그러나 그토록 오래 참빗 일을 해온 노소들도 언제부터 어떻게 이 마을에서 참빗 일을 하게 되었는지의 유래를 모른다.
몰락한 양반으로 지게질이나 논밭 일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목이 거미줄을 칠 수 없어서였겠지 하고 막연하게 추측만하고 있을 뿐 이렇다할 구전하나 뚜렷한 것이 없다. 『뱃속에서부터 참빗 밥을 먹고 컸다』는 이 노인도 이 물음에는 고개를 돌린다.
영암 참빗에는 대소, 중소, 어중소, 밀소의 4종류가 있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중소이다.
대소는 가장 큰 빗으로 망호리 앞 부락인 군서면 송평리에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담배갑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중소, 어중소(살수가 1백 40개)와 가장 작은 밀소(1백 10살) 만이 남아있다. 이 빗들 중 양쪽 끝에서 살을 막아주는 막이(일명 모막이)의 종류에 따라 중소의 경우 우골로 된 것이 골중소, 나무는 목중소, 대(죽)는 대중소라고 한다.
참빗 만드는 일은 죽순이 돋는 4, 5월을 제외하고는 사철을 가리지 않는다. 먼저 톱으로 매듭길이로 잘라서 「묵직칼」로 폭 5mm가량을 규격있게 쪼갠다. 다음 「조름」이라는 칼날이 양쪽에 달린 기계에 문질러 그 폭을 일정하게 다듬고 「들칼」로 대쪽의 등과 배를 따는데 공을 들이는 빗살은 여러 번 이 작업을 계속한다. 참빗의 우열은 살을 다듬는 이 과정에서 1차로 판정이 난다. 살이 완성되면 실로 엮는데 보통 것은 양사를 쓰고 고급품은 보다 가는 이합사를 쓰되 살은 1백 10에서 1백 60까지 품질에 따라 그 폭이 넓다. 같은 크기에 살수가 많으면 살대 사이가 더 배고 가늘어 「머리카락의 껍질」까지 벗겨낼 수 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영광과 담양 두 곳에서는 참빗 조합이 있어 일본 등지에서 까지 주문을 받곤했지만 세월을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낮은 가격과 플라스틱 제품의 모양 좋은 빗과 중성세제의 개발 등에 밀려 이제는 시장 뒷전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게 됐다.
요즘도 그러하지만 참빗전은 장날아침 어둑어둑할 때 뒷골목에 잠시섰다가 점차 날이 밝아 본격적인 장이 설라치면 파장이 되곤 해 참빗장은 도깨비 장을 본다 고들 했지….
부락에서 모아온 참빗은 10개를 한죽, 1백개를 한쌈이라고 하는데 요즘 장날에 나오는 값은 최고급이 2백원에서 15원까지 천차만별. 올 들어 영암·담양 장을 합쳐야 한 장에 나온 것이 평균 30여쌈-.
『아들 며느리와 같이 한참동안(5일간) 부지런히 일을 해야 겨우 한쌈 남짓인데 요즘 젊은이들이 이 일을 하려고 하겠어 하며 씁쓸히 웃었다.
글 정천수 기자
사진 양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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