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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눈 뜬 스크린, 사회에 말을 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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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올해 한국영화는 수컷 냄새가 물씬 풍겼다. 체제와 권력에 희생된 개인, 계층갈등 등 충무로가 사회성 강한 소재에 주목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당연 남자배우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더 테러 라이브’의 하정우, ‘설국열차’의 송강호,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김수현, ‘신세계’의 황정민. [중앙포토]

새로움에 대한 끝없는 열정. 2013년 문화계도 크게 요동쳤다. 영화·가요 등 대중문화의 산업적 기초가 단단해진 반면 문화 종사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도드라지기도 했다. 올해 문화 각계의 명암을 분야별로 짚어본다. 먼저 영화계를 키워드로 정리했다. 올 한국영화는 역대 최고 관객(1억 1547만 명·11월 말 현재)을 기록하는 기세를 보였다.

①현실만한 상상력이 있을까

 사회 이슈를 소재로 한 영화가 대세를 이뤘다. 개인·조직간 이익이 충돌했던, 우리들의 오늘에 대한 일종의 은유다. 영화의 사회적 기능이 새롭게 부각됐다.

 계층 별로 칸이 나눠진 기차 내의 권력투쟁으로 현실을 풍자한 ‘설국열차’(봉준호 감독)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권력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개인을 그린 ‘관상’(한재림 감독), 소외 계층의 분노를 담아낸 ‘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감독)와 ‘숨바꼭질’(허정 감독), 통제 사회의 그늘을 보여준 ‘감시자들’(조의석·김병서 감독), 아동 성폭행을 다룬 ‘소원’(이준익 감독) 등도 화제가 됐다.

 외국에 억류됐던 주부의 실화를 극화한 ‘집으로 가는 길’(11일 개봉, 방은진 감독)과 인권 변호사를 다룬 ‘변호인’(18일 개봉, 양우석 감독)도 국가·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개인을 주목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정치·사회 이슈와 접점을 가진 오락영화들이 사회 공론장의 역할을 해왔다. 정치가 해야 할 기능을 일정 부분 영화가 담당한 셈”이라고 말했다.

 ②이념은 가고, 경계인은 남고

 ‘베를린’(류승완 감독) ‘은밀하게 위대하게’(장철수 감독) ‘동창생’(박홍수 감독) ‘용의자’(24일 개봉, 원신연 감독) 등 올해 한국영화에는 유독 간첩이 메인 캐릭터로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경계인으로서의 비애에 무게를 실었다.

 ‘쉬리’(1999, 강제규 감독) 등 예전 영화와 달리 이념적 갈등이 줄어든 것도 한 특징이다. 북한의 정권교체, 정보당국 안팎의 갈등 같은 현실 정세를 반영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간첩영화가 할리우드의 ‘본 시리즈’ 같은 액션첩보 장르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영화 속 간첩은 최고의 살인병기인 동시에, 소속과 가족을 잃은 남자로서의 비극적 신파성을 지녔다”고 평했다.

 ③충무로 세대교체 오나

 ‘더 테러라이브’의 김병우, ‘숨바꼭질’의 허정, ‘몽타주’의 정근섭, ‘연애의 온도’의 노덕 등 신인 감독들이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쏟아내며 충무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때 정체됐던 충무로의 세대교체도 예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평론가 김형석씨는 “올해 부각된 신인 감독들은 상업영화의 흥행코드와 자기만의 색깔을 절충하는 솜씨가 빼어나다”고 평가했다.

 신생 투자배급사 뉴(NEW·넥스트 엔터테인먼트 월드)의 약진도 두드러졌다. ‘7번방의 선물’ ‘감시자들’ ‘숨바꼭질’ 등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한국영화 배급사별 관객 점유율(11월말 현재)에서 27.5%를 차지했다. 1위 CJ E&M(28.8%)을 바짝 뒤쫓고 있다. 영화진흥위 임우정 팀장은 “연말 개봉영화의 흥행성적이 변수지만, 지금까지의 성적만 봐도 뉴의 기세가 놀랍다”고 말했다.

 ④중견 배우들의 재발견

 송강호(46)·류승룡(43)·황정민(43)·이정재(40)·정우성(40) 등 40대 남자배우들이 흥행파워를 과시했다. 특히 송강호는 ‘설국열차’ ‘관상’ 두 편으로 18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데 이어, ‘변호인’ 개봉까지 앞두고 있어 올해 2000만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일 전망이다.

 이정재는 ‘신세계’(박훈정 감독)와 ‘관상’의 열연으로 ‘비주얼 배우’라는 꼬리표를 뗐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올해 남자배우들의 강세는 권력구조를 다룬 영화들이 많이 나온 것과 관련이 있다”며 “충무로가 거시적인 스토리에 주목하면서, 영화 전반에 남성성이 강화되는 경향이 뚜렷했다”고 설명했다.

정현목 기자

◆도움말=영화평론가 강성률(광운대 교수)·강유정·김봉석·김형석·전찬일·황영미(숙명여대 교수)·황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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