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저또」 소극장 공연을 보고|가난한 연극 속에 느껴지는 사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을지로 입구의 한 철거될 지역, 곧 부서질 듯한 건물의 좁다랗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판자문을 열면 조그마한 방이 있고 그 방의 반을 갈라 한쪽은 무대이고 그 반쪽은 객석이다. 말이 무대이고 객석이지 연극을 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거의 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창고
그러나 객석의 불이 꺼지고 깡통으로 만든 조명등에 불이 밝아지면 창고는 곧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되고 죽음만을 유일한 살길로 찾는 두 남자 (돼지들)의 지극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지극히 슬픈 상황이 무겁게 20여명의 관객을 윽박지른다.
참으로 또한 관극 체험이다. 「부유한」 연극의 허상이 「가난한」 연극의 실체에 의해 추방당하고 「연극을 통해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속에서 연극을 사랑하는 자 의 그 사랑을 무언 중에 느끼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은 작가 김용락과 연산자 방태수와 더불어 30여분간의 체험에 대한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갖고 그러한 의견은 곧 다음 공연에 반영된다 한다. 참으로 민주적이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의 민주적인 방법의 부당성과 그 한계는 엄격히 감시되어야 되지만 연극과 관객이라는 절대적인 한계에 대한 연구의 초보적 단계로서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에저토」의 모든 것은 발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저토」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돼지들의 산책』 (유진규·문흥섭)은 소위 「새로운 연극」이 가진 특징들을 몇 가지 실험해 본 작품으로 주목 할만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인 현대의 우화 또는 신화로의 상승력이 부족했고 오히려 연출에서 각목 구조물과 줄을 이용한 선과 힘의 시각화와 그것이 가진 추상적 의미의 구축이 극적 효과를 살렸다. 그러나 연기자에게 미칠 수 있는 연출자의 역량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한편 한국인의 몸짖을 새로이 규명해 볼 의도로 시도된 「마임」『첫 야행』 (유진규)은 그러한 시도 자체의 의의는 크지만 굳어버린 일상적 「패턴」을 극복하지 못해 흔히 보는「시늉」으로 끝난 것 같은 느낌은 본래의 목적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한상철 <연극 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